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33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묶여 있던 세 처치

보건소 상담실 창가에는 지난여름 봉사자들이 심었다는 로즈메리 화분이 있었다. 노영숙은 그 잎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에 남은 향을 맡은 뒤에야 의자에 앉았다. 보건소까지 오는 길은 짧았지만 쉬는 시간을 두 번 가졌고, 문하진은 돌아갈 차가 바로 아래에서 기다리는지 확인했다. 영숙이 직접 오겠다고 한 외출이었다. 오래된 동네를 차창으로 보는 게 좋다는 이유도 있었다.

글자 크기

보건소 상담실 창가에는 지난여름 봉사자들이 심었다는 로즈메리 화분이 있었다. 노영숙은 그 잎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에 남은 향을 맡은 뒤에야 의자에 앉았다. 보건소까지 오는 길은 짧았지만 쉬는 시간을 두 번 가졌고, 문하진은 돌아갈 차가 바로 아래에서 기다리는지 확인했다. 영숙이 직접 오겠다고 한 외출이었다. 오래된 동네를 차창으로 보는 게 좋다는 이유도 있었다.

“상담하러 와 놓고 화분 냄새만 맡네.” 윤채영이 말했다.

“병원 냄새만 맡으면 하루가 너무 길어. 이건 집에 가져가면 잘 자라려나?”

“우리 집 화분은 엄마가 물을 너무 줘서 죽었잖아.”

“식물도 가끔은 사랑이 과해 죽지.” 영숙이 웃었다. “사람은 어떨까?”

채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농담으로만 하지 않았다.

오세현이 종이 세 장을 식탁처럼 넓은 상담 책상 위에 놓았다. 어제 병원 안내문에서는 한 줄에 이어져 있던 말들이었다. 영숙이 글씨 크기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첫 장을 읽고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내가 여기서 뭘 고르면, 나중에 그 사람들이 그대로 하나?”

“오늘은 어르신이 무엇을 원하고 걱정하는지 분명히 하는 시간입니다.” 세현이 말했다. “실제 상황에서는 상태와 병원 설명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정식으로 필요한 문서와 절차도 따로 확인하고요. 제가 이 종이 하나로 모든 일을 보장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 못 하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지.”

하진은 세 장을 한꺼번에 읽지 말자고 했다. 영숙은 자신이 쉬는 동안 채영도 물을 마시라고 했다. 딸의 손에는 어제부터 빨간 줄이 있었다. 여행가방 손잡이를 너무 오래 쥐어 생긴 자국이었다. 채영은 손을 감추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첫 장은 숨을 쉬기 어려워졌을 때 몸에 관을 넣어 기계의 도움을 받는 처치에 관한 것이었다. 세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목적과 몸에 따르는 부담, 그 처치 뒤에도 상태를 다시 살펴야 한다는 점을 일상어로 설명했다. 영숙은 듣다가 질문했다.

“그걸 하면 손녀 오는 토요일까지 눈 뜨고 얘기할 수 있어?”

세현은 그럴 수도 있다고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걸 약속할 수 없습니다. 어르신이 가장 지키고 싶은 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겁나는 건 기계 자체보다, 나를 깨우지 못할까 봐인가 보네.”

채영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 기계가 있어야 다음 기회라도 있는 거 아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내 다음 기회가 어떤 모습인지도 내가 생각해야 하잖아.” 영숙은 딸을 보았다. “너는 내가 하루 더 있는 것보다, 나랑 하루 더 얘기하는 게 좋다고 했었어.”

“그런 말을 이런 데서 꺼내?”

“집에서는 또 서로 소리칠까 봐.”

하진이 중간에 말을 보태지 않았다. 채영은 입술을 다물고 창밖의 버스 정류장을 보았다. 유모차를 미는 사람과 장바구니를 든 노인이 같은 벤치 앞에서 서로 비켰다. 밖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느린 대화를 모른 채 하루를 움직였다.

두 번째 장에는 심장이 멈춘 상황에서 시행할 수 있는 응급 처치가 적혀 있었다. 영숙은 세현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잠깐. 내가 숨이 차다고 전화했을 때 하는 일이랑, 심장이 멈춘 뒤 하는 일이 같은 걸로 묶여 있었어?”

“아닙니다.”

“그런데 안내문에선 다 한 호흡으로 적혀 있었지.”

“제가 어제도 그 문장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당신 잘못은 아니지. 다만 듣는 사람은 한꺼번에 삼키게 돼.”

영숙은 가방에서 손녀의 별 지우개 연필을 꺼냈다. 첫 장과 두 번째 장 사이에 긴 선을 그었다. 그제 밤에는 관찰 시간을 정하는 데 썼던 연필이었다. 오늘은 말의 경계를 긋는 데 썼다.

세 번째는 집중적인 감시와 여러 처치를 할 수 있는 병실에 관한 설명이었다. 영숙은 더 빨리 피곤해졌다. 하진이 중단하자고 했지만 영숙은 마지막 문장까지만 듣겠다고 했다. 듣고 나서 바로 고르지는 않았다. 로즈메리 화분을 다시 만지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 방은 내가 들어가면 언제 나오는지 정할 수 있어?”

세현은 영숙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로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병실로 가는 결정과 그 안에서 받는 개별 처치는 상황에 따라 다시 설명받아야 한다고. 영숙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 알고 싶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 그곳의 감시가 필요한지, 집이나 일반 병실에서 해 볼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세현과 하진은 그 질문을 적어 뒀다가 해당 의료기관에 확인하기로 했다.

채영은 어머니의 손 옆에 자기 손을 놓았다. “셋 중 하나는 남겨 두면 안 돼?”

“네 마음을 나도 알아. 전부 빨간 줄 긋고 마음 편해지려는 것도 아니야.”

“나는 엄마가 살 수 있는 걸 놓칠까 봐 그래.”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나로 있을 길을 놓칠까 봐 그래.”

둘은 오래 말이 없었다. 영숙은 채영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세현은 각 장의 끝에 영숙이 한 질문을 자기 말 그대로 적었다. ‘토요일까지 얘기할 수 있나.’ ‘지금 숨찬 것과 멈춘 뒤의 일은 다른가.’ ‘내가 다시 물을 수 있나.’ 처음 가져온 용어보다 영숙의 질문이 종이에 더 큰 자리를 차지했다.

점심 무렵 영숙은 두 장에 지금 원치 않는다는 표시를 했다. 삽관과 심폐소생에 관한 종이였다. 세 번째 장은 아직 결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병원에 짧게 가서 산소와 불편함을 덜기 위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남겨 두고 싶었다. 채영은 어머니가 두 장에 표시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지막 장을 빈 채 두는 손을 보았다. 전부 닫힌 문이 아니었다.

표시를 한 뒤 영숙은 종이를 세현에게 바로 주지 않았다. 연필을 가로로 놓고 눈을 감았다. 채영은 자기가 또 말을 붙이면 어머니가 힘들어할까 봐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 영숙이 눈을 뜨고 물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골랐다고, 네가 나중에 화낼까?” 채영은 아니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날 수도 있었다. 자신이 붙잡고 싶은 순간에 어머니가 선을 그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문서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화낼 수도 있어. 겁나면 화부터 나니까.” 채영이 말했다. “그때 내가 엄마한테 화내는 대신, 하진 씨한테 먼저 설명을 다시 들을게.”

“내 말도 다시 들어.”

“엄마가 말할 수 있으면 제일 먼저.”

그제야 영숙이 종이를 건넸다. 채영의 정직한 대답이 거짓 안심보다 나았다. 하진은 두 사람이 오늘 내린 표시가 다음 대화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세현은 영숙의 질문을 별도 여백에 남겼다. 그 여백은 단지 절차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녀가 서로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기로 한 흔적이었다.

“그러면 그날 밤처럼 숨이 찰 때, 연락하고 살펴보는 일은 계속인 거죠?” 영숙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진이 말했다. “어르신이 원치 않는 처치를 말한 것과 돌봄을 멈추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음 방문에서도 무엇이 필요한지 계속 묻겠습니다.”

세현은 그 문장을 새 종이 맨 위에 크게 썼다. ‘계속 돌본다.’ 영숙이 웃었다.

“이제야 시험지에 정답 같은 문장이 나왔네.”

“정답이라고 하시니 부담됩니다.”

“그럼 오늘 답. 내일 바뀔 수도 있는.”

세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수술실에서 그는 생명을 붙드는 처치가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배웠다. 오늘은 하지 않기로 고른 두 장 옆에서,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빽빽하게 남는 것을 보았다. 불편함을 묻고, 숨의 변화를 보고, 채영이 쉴 시간을 확인하고, 영숙의 말을 다시 들을 일.

돌아갈 차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영숙은 로즈메리 잎 하나를 따도 되느냐고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은 화분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영숙은 웃으며 손을 뗐다. 대신 향이 묻은 손가락을 코끝에 댔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장독대 헝겊부터 꺼내겠다고 말했다.

복도에서 영숙은 오래된 지인과 마주쳤다. 지인은 밝게 인사하다 영숙의 산소 장비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으세요?” 영숙은 “오늘은 세 장 읽느라 머리가 아프다”고 답했다. 지인은 더 묻지 않고 자기 손에 든 귤 봉지를 보여 줬다. 영숙은 귤 하나를 얻어 채영에게 까 달라고 했다. 상담실 안에서 죽음과 기계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도, 복도에선 귤의 단맛을 고를 수 있었다. 채영은 손톱 밑에 귤 껍질이 끼는 걸 싫어하면서도 두 알씩 나누어 어머니 입에 넣었다.

“내일 장독대 헝겊 같이 찾자.” 채영이 말했다.

“어디 있는지 난 알아.”

“그럼 왜 못 찾았어?”

“네가 찾는 걸 보고 싶어서.”

채영은 귤 껍질을 봉투에 넣으며 웃었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세 장의 내용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쉬는 시간도 선택을 지탱하는 시간이었다.

채영은 세 장의 종이를 파일에 넣다가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가 다음에 마음을 바꾸면, 내가 뭘 해야 해?”

영숙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우선 내 말을 들으면 되지.”

“그다음은?”

그다음은 아무도 즉시 답하지 못했다. 하진은 영숙이 지금 말할 수 있을 때 정한 뜻과 나중에 달라진 뜻을 어떻게 알아보고 전달할지 다음 방문에서 함께 정하자고 했다. 채영은 파일을 가방 깊숙이 넣지 않고 맨 앞칸에 놓았다. 세 장은 완성된 판결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다시 말할 수 있도록 남겨 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