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병 뒤의 다섯 이름
“이건 제 봉투가 아닙니다.”
“이건 제 봉투가 아닙니다.”
전날 밤 원물 상자를 운반하고 아침 확인에 온 이씨가 원물 대금 봉투를 최옥순 앞으로 밀었다. 금액은 맞았다. 그런데 봉투 위에는 박 여사의 입고번호가 적혀 있었다. 윤보리는 뜨거운 병을 잡을 때보다 더 빠르게 손을 뻗었다.
“봉투를 아직 열지는 않으셨죠?”
“이름 보고 돌려준 거예요. 돈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이 번호로 계속 가면 내 과일이 남의 병이 되잖아요.”
이씨가 가장 걱정하는 일은 그제 가림평가 1위를 자랑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니었다. 어젯밤 시험 혼합비로 만든 소량 배치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집 과육이 들어갔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보리는 봉투와 원장을 나란히 놓았다. 전날 저녁 배치의 입고번호는 맞았고 지급 봉투를 인쇄할 때 줄이 하나 밀렸다. 다행히 아직 누구에게도 돈이 지급되지 않았다.
옥순이 봉투를 다시 쓰겠다고 했다. “돈 받기 전에 잡혔으니 됐지.”
“병 라벨도 이 줄에서 뽑혔어요.” 보리가 말했다.
포장대에는 서리과 시험제품의 앞면과 뒷면 시안이 쌓여 있었다. 앞면에는 공동주방 이름만 큼직했다. 뒷면에는 원산지, 원재료와 냉장보관 안내, 생산 로트가 있었다. 보리는 다섯 농가 원물카드를 연결할 작은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까지 밀렸으면 출고 전에 바로잡아야 해요.”
류미정이 칼을 내려놓았다. “오늘 시식처에 보낼 소량 시험 배치는 아직 냉장고 안에 있어요. 병은 건드리지 말고 인쇄본부터 전부 비교해요.”
오전 회의에 다섯 농가가 모였다. 보리는 원장의 실명과 병에 들어갈 코드를 다른 쪽에 놓았다. 첫 QR 공개 범위를 시험했을 때 세 집은 자발적으로 이름 공개를 골랐고 두 집은 코드를 택했다. 그 선택은 판매가 늘었다고 저절로 바뀌지 않았다. 공개를 고른 농가도 이번 공동상품의 앞면에 매번 자기 이름이 크게 나가기를 원하는지 따로 물어야 했다.
“앞에는 조합 이름 하나로 갑시다.” 옥순이 말했다. “다섯 집 이름을 다 넣으면 소비자는 누가 만든 병인지도 모르겠어.”
박 여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좋은 과일을 낸 집도 안 보이잖아요.”
이씨가 받았다. “이름이 보이면 좋은 날은 좋지. 멍든 날은 ‘이씨 집 흠과’가 되겠지.”
미정은 병 하나를 들어 밑면을 가리켰다. “흠이 생긴 원인이 밭인지, 냉동창고인지, 우리가 씻다가 놓친 건지도 따져야 합니다. 농가 이름만 전면에 내세우면 주방 실수까지 농가가 뒤집어써요.”
보리는 준비한 빈 라벨 두 장을 보여 줬다. 앞면에는 ‘서리과 복숭아 콩포트’와 맛을 설명하는 짧은 문구. 뒷면에는 관련 표시와 로트번호, 농가코드별 원물 비율. 내부 원장만 코드를 실명과 입고표, 손질 기록으로 이어 주었다. 소비자가 보는 QR에는 정확한 집 주소나 창고위치가 없었다.
“지난번 QR에는 세 농가 실명이 선택한 범위 안에서 보였죠.” 보리가 말했다. “이번에는 한 병에 다섯 집 원물이 섞입니다. 병 뒤는 코드와 비율만 넣는 게 어떨까요? 공개 이름을 원하시는 분은 생산자 소개 페이지에 따로 유지하고요.”
“병 뒤에 내 이름이 없다면 내 몫은 어디 있어?” 박 여사가 물었다.
“병에서 찾을 수 있는 코드에 있어요. 돈은 내부 원장에서 계산합니다.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선택과 정산권을 따로 두자는 거예요.”
해진이 작업장 밖에 있는 것은 미정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측소 출근 전 들러 라벨 인쇄기 카트리지를 사다 놓고 나가는 길이었다. 보리가 문을 열어 부르자 그는 다섯 사람이 둘러선 병을 보고 멈췄다.
“기술 문제면 봐 줄게. 누가 공개돼야 하는지는 당사자들 문제고.”
“인쇄기 번호가 밀렸는지만 같이 봐 줘.”
그는 병 하나의 로트번호를 읽고 원장에 적힌 투입순서를 확인했다. 잉크가 번지는 문제는 없었다. 병 뒤 숫자가 너무 작아 다섯 코드를 한눈에 읽기 어려웠다. 보리가 글자를 키우자 필수표시가 아래로 밀렸다. 미정이 라벨 폭을 늘리자고 했다. 옥순은 인쇄비를 걱정했다.
“앞면은 단순하게, 뒷면은 읽히게.” 미정이 말했다. “눈에 안 보이는 추적표는 추적표가 아니에요.”
다섯 농가가 돌아가며 라벨을 잡았다. 박 여사는 돋보기를 쓰지 않고 코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씨는 자기 코드가 무슨 숫자인지 외우지 않아도 입고표에서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보리는 하나씩 고쳤다. 그녀의 이름은 앞면에 ‘개발’로 작게 들어가 있었다. 박 여사가 웃었다. “당신 이름은 다섯 코드보다도 작네.”
보리가 해진을 봤다. “제 이름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까 문 열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던데요.”
미정이 펜을 탁 내려놓았다. “둘이 라벨 얘기하는 동안 저는 다음 장터 최대 60병의 표시 계획을 봐야 합니다.”
“라벨 얘기 맞아요.” 보리가 말했다.
“맞으면 더 빨리 도와요.”
웃음이 지나자 작업은 더 촘촘해졌다. 병 하나마다 어떤 원물이 몇 그램 들어갔는지 모두 직접 재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한 번의 배합으로 만든 배치의 투입량을 기록하고, 그 배치에서 나온 병이 같은 로트를 갖도록 했다. 부주의로 다른 배치를 섞는 순간 로트 전체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해진은 데이터 양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가 보리에게 거절당했다. “제일 먼저 종이 원장을 우리가 읽을 수 있게 해야 해요. 프로그램이 고장 나도 병을 찾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번호를 읽는 일을 맡았다.
점심 무렵 시험 인쇄본이 나왔다. 보리는 빈 병에 붙여 보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 손으로 문질렀다. 물기에도 글자는 남았다. 박 여사가 자기 코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고 이씨는 투입비율을 읽었다. 옥순은 안심한 표정으로 출고 상자를 열었다.
“잠깐요.”
미정의 목소리가 주방을 멈췄다. 그녀는 첫 병과 두 번째 병의 코드를 나란히 가리켰다. 이씨 원물카드가 박 여사의 코드 아래에, 박 여사 카드가 이씨 코드 아래에 있었다. 봉투 오류를 고친 뒤 인쇄 자료를 새로 불러오지 않은 것이다. 숫자는 또렷했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옥순이 이마를 짚었다. “출고 전에 봐서 다행이다.”
“다행인 건 맞지만 뗄 건 다 떼야 해요.” 보리가 말했다.
“라벨만 고치면 되는 거지?”
“로트는 그대로예요. 다만 원료코드가 바뀐 라벨을 붙인 병을 남기면 나중에 어느 걸 팔았는지 모르게 돼요. 오늘 인쇄한 건 전량 버리고, 이미 붙인 것도 전량 다시 하겠습니다.”
미정은 뜯어낸 라벨 수를 세고 보리는 재인쇄 수를 세었다. 당초 오후에 시식처로 내보내려던 소량 시험 배치는 한 시간 늦어졌다. 시식 담당자에게 품질표시 확인으로 전달시각이 늦는다고 알렸다. 예약 34병은 아직 본생산 전이었다. 누구 집 과실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쓰지 않았다. 박 여사는 보리 옆에서 라벨을 떼며 물었다. “이씨가 아침에 봉투 안 돌려줬으면?”
“우리가 더 늦게 알았겠죠. 그래서 내일부터 봉투와 병을 서로 다른 사람이 확인해요.”
“내가 먼저 볼게.” 이씨가 말했다. “이번엔 내 번호쯤 바로 찾겠습니다.”
새 라벨이 모두 붙었을 때 다섯 집은 빈 상자 한쪽에 자기 코드가 맞는지 서명했다. 그 서명은 공개 이름을 강요하는 서명이 아니었다. 자기 몫과 문제가 생겼을 때의 연락 경로가 맞는지 확인하는 서명이었다. 보리는 서명을 가리켜 미정에게 말했다. “다섯 이름이 병 앞에는 없지만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해진이 마지막 상자를 들어 주려 하자 미정이 테이프를 건넸다. “운반료는 아직 안 정했습니다.”
“한 병 시식권으로요?”
“이번에는 안 됩니다. 정확한 라벨 붙은 병을 정가로 사세요.”
보리는 영수증을 쓰며 지난번 웃는 복숭아 대신 다섯 개의 작은 점을 그렸다. 해진이 왜 다섯이냐고 묻자 그녀는 “한 병 뒤에 다섯 집이 있어서요”라고 했다. 그는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상자가 나가기 전 미정은 병 하나를 골라 가짜 문의를 했다. “이 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면 어디까지 찾을 수 있지?” 보리는 로트로 배치 장부를, 장부로 다섯 원물카드와 가열기록을 찾았다. 하지만 그날 두 번 끓인 배치를 같은 포장일로만 묶어 적은 빈틈이 보였다. 어느 시간에 포장한 병인지 모르면 주방 사고가 났을 때도 다섯 농가 모두에게 전화해야 했다. 둘은 포장시각을 한 칸 더 만들고, 둘째 배치 병뚜껑에 다른 색점을 찍었다. 코드는 농가의 흠만 찾는 표가 아니라 주방의 책임을 찾는 표이기도 했다.
박 여사는 새 라벨을 보다가 “내가 지난번에 실명공개를 택한 게 맞았나 모르겠다”고 했다. 보리는 다음 인쇄분과 소개 페이지의 공개범위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팔린 병의 기록은 남지만 앞으로의 마케팅에 이름을 계속 쓰는 동의는 별개였다. 박 여사는 오늘은 그대로 두고 다음 달에 다시 말하겠다고 했다. 보리는 그 말을 영구 허락으로 받아 적지 않았다.
상자를 실은 차가 떠나자 미정이 보리를 불렀다. 보리는 빈 포장대에 남은 잘못된 라벨 한 장을 발견했다. 구겨 버리려다 원장에 ‘인쇄 폐기 1장’을 적고 다른 폐기분과 함께 세었다. 어제 같으면 귀찮아서 넘겼을 숫자였다. 이제는 하나가 남으면 어디엔가 잘못 붙은 하나도 있을 수 있었다. 미정이 그 모습을 보고 새 라벨 검수표의 확인 칸에 자기 이름을 썼다. 오늘 출고가 늦어진 까닭과 재확인 시각도 작업일지에 정확히 적혔다.
“다음은 라벨보다 숫자가 더 작은 문제야. 이 병의 설탕값을 어느 집이 얼마나 아꼈는지, 지금부터 묻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