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32화

라그랑주 5의 유언

축소된 선량계

외벽 노동자들은 선량계를 가슴 안쪽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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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 노동자들은 선량계를 가슴 안쪽에 찼다.

사람마다 체형도, 작업복 두께도 달랐지만 버클 아래 작은 주머니의 위치만은 같았다. 우주를 향한 면과 몸을 향한 면을 거꾸로 끼우지 않도록 케이스 모서리 하나가 잘려 있었다. 선량계 보관실에는 그런 회색 케이스가 수백 개, 월별 칸에 꽂혀 있었다.

리오 박은 지난 여섯 달 치 상자를 직접 밀고 들어왔다. 바퀴 하나가 틀어진 카트가 바닥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렸다. 그는 가장 위 상자를 대조대에 올려놓고 봉인을 잘랐다. 이번 봉인은 금융부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 두 명과 의료팀이 함께 붙인 보존 띠였다.

“이름부터 가립시다.” 권도한이 말했다.

리오의 손이 멈췄다.

“어제는 좌석 번호만 보지 말자더니 오늘은 사람 이름을 지우겠다는 겁니까?”

“공개판에서만 가립니다. 의료팀은 원래 이름을 봅니다.”

“재단이 또 불확실하다고 우기면 누가 자기 몸으로 반박합니까?”

작업대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소매를 걷었다. 외벽 고정대에 쓸린 흉터가 팔꿈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리오가 아니라 도한을 보며 말했다.

“제 몸이 증거라면, 제 이름도 모두에게 보여 줘야 합니까?”

리오의 턱이 굳었다.

여자는 선량계 케이스를 밀어 놓았다. “재검진은 받겠습니다. 좌석 우선심사도요. 하지만 제 아이 학교 게시판에 엄마 피폭량이 붙는 건 싫습니다.”

상자 주위에 선 노동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는 가족에게 외벽 근무를 숨겼고, 누구는 다음 계약에서 배제될까 걱정했다. 재단이 명단 공개를 막을 때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이유는 정반대였다. 한쪽은 책임을 숨기려 했고, 다른 쪽은 자기 삶을 지키려 했다.

리오는 준비해 온 공개 요구서를 반으로 접었다.

“좋습니다. 의료팀 명단과 공개 명단을 나눕시다. 하지만 몇 명인지, 무엇을 기준으로 다시 보게 됐는지는 한 줄도 감추지 않습니다.”

도한이 빈 코드표를 띄웠다. 원래 이름은 의료실 단말에만 남고, 대조대에는 무작위 여섯 자리 번호가 떴다. 어느 번호가 어느 사람인지는 리오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문질렀지만 이의를 더하지 않았다.

진아리는 선량계 판독기의 덮개를 열었다. 어제 대피선에서 오래 서 있었던 탓에 오른쪽 귀 안의 울림이 조금 심해져 있었다. 판독기 냉각팬이 돌자 높은 음이 귀를 찔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왼쪽 귀로 회전수를 들은 뒤, 기준 선량계를 첫 홈에 넣었다.

“보관실 온도부터요.”

리오가 중앙기록 화면을 가리켰다. “이미 수치가 있는데 또 기다립니까? 여기는 전부 월 한도의 육십일 퍼센트 아래라고 돼 있어요.”

“그 숫자를 확인하러 온 거예요. 이 결정은 보관열을 오래 받으면 신호가 변하거나 줄 수 있어요. 그러면 원래 받은 선량을 그대로 되짚기 어렵습니다.”

아리는 상자마다 붙은 온도띠와 지난 여섯 달의 보관실 로그를 맞췄다. 이틀치 로그가 비어 있는 보관함 하나는 상자째 보류대에 옮겼다. 지금 판독할 케이스들의 보관기간에는 허용범위를 벗어난 구간이 없었고 판독기의 기준값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첫 개인 선량계를 홈에 눕혔다.

가열판이 첫 결정 하나를 데우자 희미한 빛이 번졌다. 화면 위 곡선이 올라갔다. 중앙기록의 얌전한 막대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봉우리가 멈췄다.

월 한도 추정치 94퍼센트.

“다시.” 리오가 말했다.

아리는 같은 결정을 다시 읽지 않았다. 한 번 가열한 열형광 결정은 원래 신호를 잃는다. 대신 케이스 안에서 아직 판독하지 않은 대조 결정과 같은 작업조의 대조 선량계를 차례로 꺼냈다. 두 번째 곡선도 중앙값을 넘었다.

“한 사람 값으로 결론 내리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작업 위치와 시간, 차폐 방향이 같은 것끼리 봐야 합니다.”

가온이 화면 한쪽에 작업동선을 불러왔다. 사람 이름은 없고 외벽 구획과 체류시간만 있었다. 중앙망에 기록된 선량은 모든 구간에서 비슷한 높이로 잘려 있었다. 58퍼센트, 60퍼센트, 61퍼센트. 그 이상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도한이 손가락으로 상단을 그었다.

“투자안정-90의 상한절단과 모양이 같습니다.”

“같은 정책이라고 확정합니까?” 진아리가 물었다.

“아직은 모양만 같습니다. 규칙 버전과 적용 기록을 따로 보죠.”

재단 위험관리실에서 곧바로 이의가 들어왔다. 개인 선량계는 보관열과 작업자 착용 오류에 민감하므로 중앙기록을 뒤집을 수 없다는 문장이었다. 이어서 건강정보 보호를 위해 개인별 재판독 결과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리오는 통신창에 그 문장을 띄워 놓고 웃지 않았다.

“우리가 이름을 가리자고 했더니 재단이 갑자기 개인정보를 걱정합니다.”

아까 소매를 걷었던 여자가 말했다. “걱정하게 두세요. 대신 우리 핑계로 숫자까지 닫게 하지는 마십시오.”

리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상자를 세 갈래로 나눴다. 보관온도나 봉인이 의심되는 것은 재판독 보류. 작업시간이 빠진 것은 동선 확인. 두 조건을 통과한 것은 즉시 판독. 아리는 케이스 방향과 작업복 바깥면의 마모를 확인했고, 도한은 중앙 규칙 버전을 맞췄다. 리오는 노동자들에게 한 명씩 전화를 걸어 공개 범위와 재검진 동의를 물었다. 빨리 하라고 다그치던 그가 통화가 끝날 때마다 상대의 대답을 다시 읽어 주었다.

서른일곱 번째 선량계에서 첫 분명한 대응표가 나왔다.

개인 결정 판독은 월 한도 109퍼센트. 작업 위치와 시간으로 계산한 예상 범위는 101에서 116퍼센트. 중앙기록은 61퍼센트였다. 세 숫자가 화면에 나란히 섰다.

도한이 규칙 적용 이력을 열었다. 압력 사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정책 뿌리 아래에 ‘방사선 변동 완충’이라는 하위 규칙이 있었다. 임계값을 넘는 짧은 상위 구간을 월평균으로 바꾸고, 바뀐 값만 대피 우선순위 서버로 보내는 구조였다.

리오가 의자를 걷어차려다 멈췄다. 바닥 고정 볼트에 닿기 전, 부츠 끝이 허공에서 굳었다.

“외벽에서 한 번 맞고, 기록에서 한 번 지워졌군.”

“피폭량과 건강영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의료팀 판독관이 말했다. “여기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재검진과 우선심사가 필요한 범위입니다.”

“그 말도 공개표에 넣으세요.” 리오가 대답했다. “재단이 우리 모두 병자라고 했다고 공격하지 못하게.”

도한은 공개판의 제목을 바꿨다.

고선량 확정 명단이 아니라, 개인 계측 재확인 대상.

그 아래 세 칸이 생겼다. 판독 완료, 의료 재검진, 좌석 우선심사. 이름은 어느 칸에도 없었다. 대신 코드와 인원수, 사용한 기준, 아직 남은 오차가 표시됐다.

오후 교대가 끝날 무렵까지 예순세 명이 새 기준선을 넘었다. 모두가 한도를 초과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장상태와 작업동선을 통과한 선량계에서 중앙기록보다 의미 있게 높은 누적값이 나와, 의료팀의 추가 확인과 대피 우선순위 재심사가 필요해진 사람이 예순세 명이었다.

숫자가 공개판에 올라가자 도킹링 쪽에서 곧 연락이 왔다. 전날 훈련을 시작한 이백삼십이 석의 임시 배정표를 고정할 수 없다는 통보였다. 의료 우선순위 후보가 한꺼번에 늘었기 때문이다.

도킹 관리자는 그 표와 별개로 다음 교대에 추진제·흡착통·식수 실물을 전부 세겠다고 알렸다. 사백이십은 아직 의자의 수일 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아니었다.

“또 처음부터군요.” 관리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리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서둘러 좌석표를 확정했다면, 지금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낮은 중앙값 때문에 뒤로 밀렸을 것이다. 그는 화면에서 예순세이라는 숫자를 오래 보다가 외벽 작업자들에게 몸을 돌렸다.

“어제 저는 봉인을 뜯으면 자리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견디기 어려워 보였다.

“오늘은 압니다. 자리를 열어도 순서가 거짓이면, 사람은 또 밖에 남습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조합원 명단을 의료팀 금고에 넣었다. 공개판에는 코드표 사본만 남겼다.

“이 사람들은 수치가 아니라 몸으로 선량을 받았습니다. 이름은 가리고 우선순위는 되돌립시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병력을 투쟁 구호로 쓰지 않겠습니다.”

재단은 판독 전체를 중단하라는 두 번째 공문을 보냈다. 한도 초과가 확정되기 전에 주민 불안을 키운다는 이유였다. 도한은 공문을 공개판 한쪽에 그대로 붙이고, 그 옆에 답변을 적었다.

개인정보는 의료팀에만 보관. 공개표에는 인원, 판정 기준, 오차범위만 게시. 판독 중단 사유 없음.

그때 진아리가 마지막 상자에서 손을 멈췄다.

같은 작업조 선량계 열두 개가 한 묶음으로 들어 있었다. 모두 석 달 전 같은 날 외벽 방열판 교체에 사용된 것들이었다. 케이스 안에는 우주 방향과 몸 방향을 나누는 결정쌍이 있었다. 같은 작업과 차폐 조건에서 앞뒤 결정의 응답비는 평소 1에 가까웠다. 거주지 구조물과 작업복이 입자 흐름을 여러 방향으로 흩뜨렸기 때문이다.

그날 것만 달랐다.

그날은 우주를 향한 결정과 몸쪽 결정의 응답비가 모두 4에 가까웠다.

아리는 보관온도표를 다시 불렀다. 이상 없음. 작업 위치를 겹쳤다. 열두 명은 같은 외벽면에 있었지만 간격은 수십 미터였다. 판독기 기준값도 다시 확인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리오가 낮게 물었다.

“한쪽에서 뭔가 왔다는 뜻입니까?”

“방향 차가 컸다는 뜻까지만요.” 아리는 섣불리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양 때문인지, 국부 차폐 때문인지, 그날 작업 장비 때문인지는 더 봐야 합니다.”

도한은 중앙 우주기상 게시값을 같은 날짜로 돌렸다. 화면에는 ‘평상 범위’라는 초록 글씨가 떠 있었다. 외벽 작업 중지 권고도, 추가 차폐 지시도 없었다.

그런데 개인 선량계 열두 개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에는 멀리 지구가 반쯤 빛나고 있었다. 더 먼 쪽, 보이지 않는 태양 방향에서 거주지의 회전광이 한 번 번졌다.

아리는 열두 개의 케이스를 새 보존 상자에 나란히 눕혔다.

“앞뒤 결정의 응답비가 넷에 가깝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일이었어요.”

그 말 뒤에 누구도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리오가 공개판의 ‘예순세 명’ 아래에 새 빈칸 하나를 만들었다.

날짜. 방향. 원인 미확정.

그리고 중앙기록의 초록색 ‘평상’ 표시를 그 옆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