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집인가 병원인가
아침 햇빛이 여행가방의 열린 입구에 들었다. 위에는 병원복, 아래에는 노영숙의 낡은 꽃무늬 슬리퍼가 있었다. 전날 밤 채영은 환자복을 옷장에 넣고 슬리퍼를 침상 아래로 밀었지만, 잠을 설치다 다시 꺼내 가방에 넣었다. 다음 호출이 오면 물건 찾는 시간조차 무서울 것 같았다. 윤채영은 밤새 한 번도 가방을 닫지 못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나자 안도했지만, 곧 그 …
아침 햇빛이 여행가방의 열린 입구에 들었다. 위에는 병원복, 아래에는 노영숙의 낡은 꽃무늬 슬리퍼가 있었다. 전날 밤 채영은 환자복을 옷장에 넣고 슬리퍼를 침상 아래로 밀었지만, 잠을 설치다 다시 꺼내 가방에 넣었다. 다음 호출이 오면 물건 찾는 시간조차 무서울 것 같았다. 윤채영은 밤새 한 번도 가방을 닫지 못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나자 안도했지만, 곧 그 소리에 안도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되었으니까.
“여기 이거, 왜 넣었어?” 영숙이 슬리퍼를 꺼냈다.
“병원에 가면 신으라고.”
“병원 바닥도 꽃구경 시키게?”
“엄마는 꼭 그런 식으로 말해.”
“네가 가방을 열어 두고 말 안 하니까 내가 하지.”
영숙은 슬리퍼를 침상 옆에 놓았다. 어젯밤의 숨은 한결 길어졌지만 차를 마시고 거실까지 오는 데 전보다 자주 쉬었다. 채영은 그 변화가 눈에 걸렸다. 서른 분의 관찰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어젯밤의 일이지, 오늘과 내일의 보장은 아니었다.
문하진과 오세현이 오전 방문을 왔다. 영숙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먼저 말했다.
“오늘은 시험지가 몇 장이야?”
“한 장도 안 가져왔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어제 못 물은 걸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거짓말. 안주머니가 불룩한데.”
세현은 접힌 병원 안내문을 꺼냈다. “들켰네요.”
영숙은 세현에게 자리를 권한 뒤 벽에 붙은 달력을 봤다. 토요일엔 손녀가 올 예정이었다. 장독대 뚜껑에 새 헝겊을 씌우는 일은 아직 못 했다. 그 두 가지가 영숙에게는 혈압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일정이었다. 채영에게는 어머니가 다시 숨이 가빠질 가능성이 먼저 보였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달력에는 같은 날짜가 적혀 있었지만,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한번 괜찮았다고 다음에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현이 말했다. “병원에 가면 집에서 할 수 없는 검사와 처치를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익숙한 방식으로 지낼 수 있지만, 밤에 사람과 장비가 바로 닿지 않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 얘기는 알아.” 영숙이 말했다. “병원 문 들어가면 나오는 길이 왜 어려운지도 알아.”
채영이 곧장 받았다. “엄마가 싫었던 건 지난번 검사 때문에 며칠 못 잔 거잖아. 다음에는 다르게 해 달라고 하면 되지.”
“누구한테? 내 말이 통할 때는 다들 친절해. 새벽에 침대가 복도로 밀려 나가면 내가 무슨 말 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
하진은 두 사람에게 마지막 입원 때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각각 묻자고 했다. 영숙은 복도 조명이 밤에도 꺼지지 않던 것, 반복해서 이름을 말해야 했던 것, 아침마다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질문을 하던 것을 말했다. 채영은 검사 뒤 상태가 안정됐던 것, 갑자기 호흡이 나빠졌을 때 바로 사람이 왔던 것, 자신이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을 말했다. 어느 쪽 기억도 거짓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 병원에 다시 가면 원하는 걸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해.” 채영이 말했다.
“너는 집에 있으면 할 수 있는 걸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하고.” 영숙이 답했다.
세현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둘의 말을 한 줄로 정리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빠졌다. 그는 병원 안내문의 작은 글씨를 펴고, 영숙에게 어디까지 읽을 힘이 있는지 먼저 물었다. 영숙은 오전에는 열 줄쯤 듣겠다고 했다. 그다음은 점심 먹고. 하진은 억지로 설명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은 조급해졌다. “지금 다 알아야 결정하죠. 밤에 또 전화 오면 그때는 늦을 수 있어요.”
“그럼 네가 읽은 걸 나한테 말해 봐.” 영숙이 안내문을 밀었다.
채영은 첫 문장부터 막혔다. 응급실 도착 시 가능한 처치들이 쉼표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몇몇은 큰 장비가 필요하고, 몇몇은 영숙의 현재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안내문은 둘을 같은 묶음으로 보였다. 채영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하진을 봤다.
“병원에 간다는 것과 그 안에서 무엇을 받겠다는 건 따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진이 말했다. “집에 남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어떤 도움을 계속 받고, 어떤 변화가 생기면 다시 이동할지 정해야 하고요.”
“그럼 병원에 갔다가 마음이 바뀌면요?” 영숙이 물었다.
“그때 표현하실 수 있는 뜻을 다시 들어야죠.” 세현이 말했다. “지금은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말을 준비하는 거고요.”
영숙은 슬리퍼를 발끝으로 밀었다. “그럼 나는 어젯밤엔 집이 좋았고, 내일은 병원에 가겠다고 할 수도 있는 거야?”
“네. 다만 상태가 달라지면 가능한 선택도 달라질 수 있으니, 지금 걱정하시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채영은 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영숙도 딸이 자신을 집에서 내보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둘 다 반대편을 절벽이라고 생각해 한쪽 끝을 붙잡고 있었다.
점심 전에 하진은 가방을 닫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영숙은 잠깐 망설였다. 가방을 닫으면 혹시 마음이 바뀌었을 때 준비를 다시 해야 한다. 열어 두면 집 안 전체가 매일 출발 직전처럼 보인다.
가방을 닫기 전에 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손녀였다. 채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받으려다 영숙에게 먼저 넘겼다. 영숙은 화면 속 손녀에게 어제 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학교 급식에 나온 미역국에 대해 들었다. 손녀가 "할머니는 병원 밥도 잘 먹어?"라고 묻자 영숙은 잠깐 웃음을 잃었다. 작년에 입원했을 때 손녀가 병실에서 가져온 젤리를 간호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 밑에 숨겼던 일을 떠올렸다.
“병원 밥은 안 먹고 있지. 오늘은 네 엄마 계란말이야.”
“그럼 내가 토요일에 젤리 가져갈게.”
“네가 먹을 거면 두 봉지 가져와.”
통화가 끝나자 채영은 어머니에게 왜 숨겼느냐고 묻지 않았다. 영숙도 손녀에게 자기 병을 이해시키는 방식과 시간을 고를 수 있었다. 다만 채영은 토요일 약속을 달력에 적을 때 옆에 작은 물음표를 그렸다. 영숙은 그 물음표를 보고 지우지 않았다. 약속이 있어도 몸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안 되면 젤리는 네가 대신 먹어.” 영숙이 말했다.
“벌써부터 내 몫 정하지 마.”
“그럼 너도 내 병원 몫을 전부 정하지 마.”
채영은 대꾸하려다 웃었다. 어머니의 농담은 종종 협상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하진은 그 말을 계획서에 옮기지 않았지만, 채영이 어머니에게 직접 물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보았다. 가방은 아직 열려 있었고, 누구도 그 열린 입구를 실패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방은 현관 옆에 두되, 지퍼는 닫자.” 영숙이 말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내가 알게 적어 놔.”
채영이 병원복과 속옷, 충전기를 소리 내어 읽었다. 영숙은 손녀가 준 손수건을 추가했다. 이송 준비를 하는 일이 당장 이송하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다. 반대로 가방을 닫는 일도 병원에 절대 가지 않겠다는 서약이 아니었다. 채영이 지퍼를 닫는 동안 영숙은 침상 옆에 둔 슬리퍼를 집어 현관에 놓았다.
“이건 왜 빼?” 채영이 물었다.
“갔다가 돌아올 신발은 밖에 있어야지.”
채영은 그제야 웃었다. “병원에도 슬리퍼 있어.”
“그건 남의 슬리퍼야.”
영숙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손녀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토요일에 오면 장독대 헝겊을 같이 묶자는 평범한 부탁이었다. 채영은 그런 약속을 하면 어머니가 억지로 버틸까 봐 걱정했지만 막지 않았다. 영숙은 내일을 담보로 오늘의 몸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일의 일을 정해 두어야 오늘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현은 안내문 뒷면에 세 칸을 그렸다. ‘집에서 계속할 도움’, ‘병원에서 필요할 때 받을 도움’, ‘원하지 않는 처치’. 영숙은 첫 칸에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산소와 불편함을 덜어 주는 도움을 써 달라고 했다. 둘째 칸은 비워 뒀다. 셋째 칸 앞에서는 연필이 멈췄다.
“원하지 않는다고 쓰면 그 사람들이 내 숨도 안 봐 줄까?” 영숙이 물었다.
세현은 그런 오해를 막고 싶어 곧바로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병원마다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실행되는지까지 그가 대신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범위와 사전에 전달해야 할 말을 나누어 설명했다. 하진은 영숙에게 그 설명을 들은 뒤 무엇이 가장 걱정되는지 다시 물었다.
“내가 ‘그건 싫다’고 했을 때, 다른 것도 다 싫다고 적힐까 봐.”
채영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어젯밤 자신도 어머니의 ‘집에 있고 싶다’를 ‘아무 치료도 안 받겠다’로 들었다. 영숙은 그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세현은 병원 안내문을 다시 펼쳤다. 삽관, 심폐소생, 중환자실이라는 항목이 한 문장 안에 붙어 있었다. 세현은 그 문장에 세로줄 두 개를 그었다. 오늘 영숙이 정한 것은 가방의 자리와 닫힌 지퍼, 그리고 앞으로 따로 물어야 할 세 가지 질문이었다. 채영은 세로줄을 보며 가방을 밀어 넣을 자리를 마련했다. 현관을 지키는 물건이 방 한가운데 있지 않아도 되었다.
세현이 돌아갈 때 영숙은 현관의 꽃무늬 슬리퍼를 신어 보였다. 왼쪽 뒤꿈치가 조금 접혔다. 채영이 새것을 사겠다고 하자 영숙은 "고쳐 신으면 된다"고 했다. 세현은 그 말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비유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다만 오늘 아침에는 닳은 신발 한 켤레가 영숙을 환자라는 이름보다 오래된 자기 삶에 붙들어 주었다. 그는 집을 나서며 채영에게 가방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고, 영숙에게는 내일 다시 물어도 되는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둘의 대답이 달라도 내일의 대화는 계속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