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미식 로맨틱 코미디 32화

서리 지난 복숭아밭

말랑함의 색표

이씨의 냄비가 향 점수 1위를 한 다음 날, 류미정은 공동주방 냉장고 앞에 색카드 여섯 장을 세워 놓았다. 윤보리가 카드를 보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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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냄비가 향 점수 1위를 한 다음 날, 류미정은 공동주방 냉장고 앞에 색카드 여섯 장을 세워 놓았다. 윤보리가 카드를 보더니 물었다.

“복숭아가 여기서 더 익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아니요. 지난해 냉동한 걸 해동 중인데 무슨 후숙이야. 어제 박 여사네 과육은 모양이 남았고 이씨네는 즙이 많이 나왔잖아요. 해동 뒤 변한 색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미정은 손가락으로 가장 짙은 갈색 카드를 두드렸다. 색만 보고 먹을 수 있다거나 버려야 한다고 판정할 카드는 아니었다. 같은 조건으로 냉장 해동한 시험통의 사진과 즙량, 냄새, 포장상태, 입고기록을 맞춰 볼 표지였다. 보리는 카드 아래 ‘숙성 단계’라고 적힌 자기 메모를 줄로 지웠다. “어제 냄비가 좋은 향을 냈다고 해동한 과육이 다시 익는 건 아니죠.”

주방에는 다섯 농가에서 지난해 수확해 외부 보관처에 맡긴 봉인 상자가 있었다. 오늘 시험에 쓸 작은 포장만 정해진 작업대에서 풀었다. 남은 것은 냉동 상태로 두고, 해동을 시작한 포장에는 시작시각과 담당자를 썼다. 해진은 출근 전 기록지만 전달하고 뜨거운 솥 가까이는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제 얼굴이 왜 저렇게 진지합니까?” 그가 색카드를 봤다.

“복숭아 표예요.” 보리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어제보다 안색이 어둡다고 해서 관측 대상이 된 줄 알았습니다.”

미정이 문을 가리켰다. “사람 얼굴은 색표로 안 잽니다. 기사님은 냉동보관처 온도기록만 놓고 가세요.”

해진은 기록을 건네며 보리에게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안색은 따로 물어봐도 됩니다.” 보리는 웃음이 났지만 그가 나간 뒤에야 웃었다. 오전 내내 손님 예약 34병과 다음 장터 생산 상한 60병이 작업표 위에서 보리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통을 열자 어제보다 즙이 많이 흘렀다. 포장의 한쪽이 찢어진 것은 아니었다. 얼었던 과육의 조직이 풀리며 물이 나온 상태였다. 박 여사는 뒤늦게 들어와 자기 통의 과육이 더 단단하다며 오늘도 그것부터 쓰자고 했다. 이씨는 향이 강한 자기 통을 먼저 솥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둘 중 하나만 쓰면 어제 배운 걸 버리는 거예요.” 보리가 말했다. “먼저 보관기록과 해동 상태를 보고 쓸 수 있는 분량을 나눠요. 그다음 둘을 섞어 봅시다.”

미정은 포장번호와 냉동 입고일을 읽고 개봉 전후 상태를 적었다. 농가가 지난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냉동했는지는 원료 특성으로 남겼다. 지금 어느 통이 ‘더 익을’ 차례라는 표시는 하지 않았다. 해동을 시작한 통은 그날의 가공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사용하며, 내일 쓸 분량은 아직 해동하지 않은 봉인 포장으로 따로 남겼다. 이상이 의심되는 통 하나는 억지로 향을 맡아 결론내지 않고 작업대 밖에 격리해 미정의 확인 목록으로 옮겼다.

“내 과일이 문제 있다는 말인가?” 장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통의 포장 연결부가 젖어 있어서요. 원물 전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정이 봉인을 가리켰다. “여기부터 확인하고 쓰겠습니다.”

장씨는 통을 다시 뺏으려다 멈췄다. 원물비가 걸린 일이었다. 보리는 격리한 통의 번호와 무게를 적고 다른 포장으로 시험을 이어 갔다. 오늘의 실험값을 맞추겠다고 확인 전 원료를 끼워 넣을 수는 없었다.

이씨와 박 여사의 과육은 같은 무게로 두 가지 비율을 시험했다. 향 쪽을 많이 넣은 솥은 첫 숟갈부터 복숭아 냄새가 올라왔지만 병 안에서 조각이 빨리 사라졌다. 형태를 더 남긴 솥은 빵 위에 올려도 흐르지 않았고 끝맛이 조금 밋밋했다. 미정이 세 번째 작은 솥에는 두 과육을 절반씩 넣었다. 보리는 그 앞에서 설탕과 가열시간을 새로 기록했다. 어제 각자 냄비의 결과를 더한 값이 오늘 혼합 솥의 결과가 되지는 않았다.

점심에 장터 상인 배정자가 왔다. 그는 어제처럼 번호만 붙은 작은 컵 세 개를 먹었다. “첫째는 향, 둘째는 씹는 맛, 셋째는 둘 다 있는데 조금 달아요.”

“셋째가 절반씩 섞은 거예요.” 미정이 말했다.

“절반이라고 맛도 딱 중간은 아니네요.”

보리는 가림평가표 뒤에 실제 배합을 적었다. 배정자는 셋째를 다시 먹고 “당도를 다시 맞춘다면 이쪽이 손님이 두 번 먹을 맛”이라고 했다. 박 여사는 자기 과육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컵 바닥에서 확인했다. 이씨는 향이 남은 것을 눈을 감고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먼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병에 들어갈 원물은 두 농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은 세 집의 냉동 원물도 포장별 상태를 확인한 뒤 아주 작은 시험 솥에 넣었다. 한 집은 산미가 살아 있어 끝맛을 정리했고, 다른 집은 가열 뒤 색이 좋아졌다. 옥순 집 것은 향이 세지는 않았지만 손질 뒤 쓸 수 있는 양이 많았다. 보리는 다섯 통 각각의 투입량을 저울에 올렸다. 시험 배치의 잠정 비율은 이씨 30, 박 여사 25, 다른 세 집 20·15·10퍼센트였다.

“이 숫자가 우리 집 값을 정하는 거야?” 옥순이 물었다.

“아뇨. 오늘 한 배치에 실제 넣은 비율이에요. 원물 기본단가와 품질가산은 따로 정해야 해요. 그리고 이 비율도 원물 상태가 달라지면 다시 시험합니다.”

보리는 가림평가 결과와 저울표, 손질손실과 가열 뒤 완제품 무게를 한 장에 모았다. 맛이 괜찮아도 어제보다 훨씬 많이 버려야 한다면 팔수록 남는 게 줄었다. 오늘 다섯 집 혼합 시험은 작은 병 여섯 개를 채웠다. 목표한 향과 형태를 모두 얻었지만 손질과 가열에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미정은 그 시간을 빈칸에 두지 않았다.

이씨가 시험병을 손에 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내 과육이 삼 할이라고 병 앞에 써?”

“앞면에는 공동상품 이름이요. 뒷면에는 원물카드와 배치별 실제 비율을 추적할 방법을 만들어요.”

박 여사가 곧장 말했다. “내 이름도 뒤에 크게 쓰면, 흠이 났을 때 내 집 탓부터 하겠지.”

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포장할 때 공개범위도 같이 정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실제 넣은 다섯 통과 그 결과를 기록합니다.”

말이 끝나자 미정이 선반 쪽을 봤다. 아침에 확인한 해동 포장 중 가장 먼저 가공해야 할 분량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 시험 솥에 시간을 쓴 탓이었다. 그것을 다시 얼려 새 원물인 척 할 수는 없었다. 오늘 사용 가능한 상태인지 다시 확인하고, 가능한 분량만 작은 배치로 가열해야 했다. 나머지는 무리해서 판매분으로 돌리지 않기로 했다.

“밤새면 되잖아.” 옥순이 말했다가 미정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두 시간짜리 소량 배치만 하죠.” 미정이 말했다. “내일 오전 제빵 교대는 한 시간 늦추고. 보리 씨도 한 철 계약에 없는 무한 야간근무는 안 됩니다.”

보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내가 하면 된다’는 말은 쉬웠다. 그 말이 쌓이면 누군가의 일은 영원히 공짜가 됐다. 이씨는 상자 운반은 돕겠다고 했지만 주방 손질은 교육 전이라 맡지 않았다. 옥순은 정확한 종료시각과 수당을 적은 작업표를 보고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이 퇴근길에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색표 때문에 퇴장했으니 반성문 대신 이걸 가져왔어요.”

“당신은 주방 밖에서 반성 계속하세요.” 미정이 말했다. “대신 보리 씨가 쉬러 나오면 컵은 건네도 됩니다.”

보리는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해진이 커피를 내밀었다. “당신 얼굴은 어느 단계입니까?”

“그 질문으로 아침에 쫓겨난 거 잊었어요?”

“아뇨. 그래서 이번에는 답을 강요 안 합니다.”

보리는 컵을 받아 들었다. 너무 뜨거워 바로 마시지는 못했다. “피곤한 단계예요. 그래도 좋은 맛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럼 오늘의 관측 결과는 피로와 성과가 동시에 있다.”

“아주 과학적이네요.”

주방문에는 사용하기로 정한 다섯 포장번호와 밤 작업 종료 예정시각이 나란히 붙었다. 미정과 보리는 두 시간만 일하고 냉장고 온도와 완제품 수를 다시 확인한 뒤 마감했다. 이씨는 빈 운반상자를 가져가며 내일 병 뒤에 자기 몫이 어떻게 적히는지 보러 오겠다고 했다. 보리는 문을 잠그고 해진에게 아직 따뜻한 커피를 돌려줬다. “내일은 종이 위 다섯 이름 때문에 더 오래 걸리겠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숫자 읽는 것뿐입니다.”

“그거면 충분해요. 이름을 결정하는 건 다섯 집이 할 테니까.”

해진이 차 문을 열자 보리는 주방에서 가져온 작은 시험병을 꺼냈다. “한 병은 오늘 다섯 집이 같이 맛보라고 남겨 뒀어요.”

“제 몫은요?”

“내일 정가로 사세요.”

“시식비 징수는 계속되는군요.”

보리는 웃고도 병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다섯 집이 오늘 시험 결과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일 같은 배합으로 팔겠다는 동의는 아직 아니었다. 특히 이씨는 자기 과육이 향을 맡는다고 반기면서도, 비율이 낮아지는 날 원물대까지 낮아지는지 두 번 물었다. 보리는 투입비율과 매입단가를 분리해서 적겠다고 했다. 박 여사는 이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도 같은 질문을 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우연히 같은 병에 들어갔다고 이해관계까지 한 덩어리로 만들 수 없었다.

해진은 차 시동을 걸지 않고 보리를 기다렸다. 그녀는 아침에 ‘숙성 단계’라 적었다가 지운 카드 한 장을 다시 꺼냈다. 그 자리에 ‘해동 뒤 상태’라고 썼다. 내일 주방에 오는 교대자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미정의 손맛을 표로 옮기는 일은 손맛을 지우는 게 아니었다. 누구 손에서든 틀린 말을 먼저 지울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