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미식 로맨틱 코미디 31화

서리 지난 복숭아밭

다섯 냄비 다섯 고집

서리과 시험주방의 벽에는 다섯 장의 종이가 걸려 있었다. 농가마다 적어 온 지난해 수확 때의 숙성·냉동 방식과 희망 원물가격. 가장 큰 글씨는 ‘오래 끓이면 실패할 일이 없다’였다. 그 밑에 누군가 연필로 ‘제일 오래 끓이는 집은 설탕도 제일 많이 쓴다’고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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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과 시험주방의 벽에는 다섯 장의 종이가 걸려 있었다. 농가마다 적어 온 지난해 수확 때의 숙성·냉동 방식과 희망 원물가격. 가장 큰 글씨는 ‘오래 끓이면 실패할 일이 없다’였다. 그 밑에 누군가 연필로 ‘제일 오래 끓이는 집은 설탕도 제일 많이 쓴다’고 써 놓았다.

윤보리는 지우개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누가 쓴 문장인지 몰라도 오늘 실험의 좋은 질문이었다. 다만 이대로 두면 질문이 아니라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다들 오시기 전에 지우죠?” 류미정이 물었다.

“글씨는 지우고, 설탕 사용량은 재요.”

미정이 냄비 다섯 개를 작업대에 올렸다. 크기가 맞는 것은 셋뿐이었다. 하나는 손잡이가 짧고, 하나는 바닥이 유난히 두꺼웠다. 보리는 솥을 바꿔 놓고 냄비 바닥에 종이번호를 붙였다. 작년 수확 때 각 농가가 손질해 외부 보관처에 냉동해 둔 가공용 복숭아가 두 킬로그램씩 봉인된 상태로 도착했다. 미정은 입고표와 보관기록을 확인하고 시험용 소분만 주방 냉장고에서 해동했다. 미정은 입고표의 지난해 수확일과 냉동 입고일을 짚어 보고 봉인의 번호를 맞췄다.

옥순은 한 봉지를 들고 냄새를 맡았다. “우리 집 건 처음부터 향이 진하네. 오래 둬서 그렇지.”

“봉지 밖 냄새만으로는 채점하지 않습니다.” 보리가 봉지를 받아 저울에 올렸다. “지난 장터 예약 서른네 병부터 맞춰야 해요. 오늘은 다섯 집이 하던 대로 만들되, 같은 양으로 시작해요.”

“당도 다르고 손질한 모양도 다른데 같은 양이면 불공평하지.” 한 농가의 박 여사가 말했다.

“그 차이를 보려고 하는 거예요. 결과를 같게 만들면 비교할 게 없어져요.”

박 여사는 대꾸 대신 미정이 해동을 끝내고 건넨 자기 통을 열었다. 얼었다 녹은 뒤에도 과육 조각이 비교적 모양을 지켰다. 맞은편 장씨 농가의 통에는 지난해 완숙 때 손질한 살에서 주황색 즙이 더 많이 흘렀다. 두 사람이 서로의 통을 봤다. 보리는 아직 말싸움이 시작되지 않은 시간을 귀하게 썼다.

“안전 확인을 통과한 분량만 써요. 수율은 원래 무게, 손질 뒤 무게, 완제품 무게를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가림 맛보기에는 만드는 분도 자기 냄비를 못 알아보게 번호를 새로 붙일 거예요.”

“내 혀를 내가 못 알아보겠어?” 옥순이 웃었다.

미정이 팔짱을 꼈다. “지난주에는 소금 넣은 식빵도 끝까지 드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작업은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열두 분 만에 첫 문제가 났다. 박 여사의 단단한 과육은 형태를 지켰고, 장씨의 완숙 과육은 주걱 끝에서 무너졌다. 옥순은 먼저 자기 솥에 불을 높였다. “우리 방식은 센 불에 향을 붙잡아야 해.” 장씨는 약한 불에서 오래 저어야 한다며 미정 손에서 주걱을 가져갔다. 냄비마다 사람 하나가 붙자 공동주방이 다섯 개의 좁은 부엌으로 갈라졌다.

보리는 타이머 다섯 개를 켰다. “오늘은 어른들 방식대로 해 보겠습니다. 대신 누가 몇 분 저었는지도 적을게요.”

“시간까지 돈으로 셀 거니?”

“누군가 더 오래 서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옥순이 흘깃 보았다. 보리는 웃는 척하지 않았다. 장터27병의 원물대와 당일 노동비는 지급했지만, 각 집에서 손질해 온 시간은 아직 빈칸이었다. 장씨가 미정에게서 가져간 주걱을 바꾸려다 말고 계속 저었다. 보리는 그 손이 멈추는 시각까지 기다려 적기로 했다.

한참 뒤 강해진이 관측소 퇴근길에 문을 열었다. 그는 자기 장화를 벗고 작은 보냉가방을 들었다. 주방 출입용 덧신까지 챙겨 온 것을 본 미정이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오늘 시식은 유료입니다.”

“지난번 네 컵 값 냈는데요.”

“그래서 이번에도 낼 줄 알았습니다.”

해진은 보리에게 웃는 복숭아가 그려진 지난 영수증을 내밀었다. “이자는 그림으로 받으셨잖아요.”

“그건 독촉장입니다.”

보리는 말을 받아치면서도 그의 가방이 궁금했다. 해진이 꺼낸 것은 작은 온도기록계와 흰 종이컵이었다. “냉장 시식 온도 같게 맞추려고요. 평가가 필요하면 옆에서 컵만 나를게요.”

“기상관측소 일이 바쁜 줄 알았는데.”

“바빴습니다. 그래서 퇴근하고 왔죠.”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고향에 머무는 기간을 한 철로 쓴 사람에게, 누가 오늘 저녁의 시간을 분명히 내어 주는 일은 큰 친절이었다. 보리는 컵을 받아 들었다. “그럼 운반료도 정산해야겠네요.”

“시식권으로 받겠습니다.”

“하나는요.”

첫 냄비가 내려왔을 때 미정은 갑자기 다섯 숟가락을 작업대에 세웠다. “어느 게 어느 솥 거였지?”

숟가락 손잡이의 색 테이프가 증기에 풀려 모두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옥순이 빨간 손잡이를 집었다. “이건 내 거야. 냄새가 달라.” 장씨도 같은 숟가락을 가리켰다. 박 여사는 둘 다 틀렸고 자기 솥 냄새라고 했다. 미정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큰일이네. 오늘 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건 주인 없는 숟가락이야.”

보리는 웃음을 참다가, 번호가 불확실한 숟가락 다섯 개를 모두 세척통으로 옮겼다. “맛볼 수는 있어도 가림평가에는 못 넣어요. 냄비에서 새 도구로 다시 떠요.”

“그 정도까지?” 옥순이 물었다.

“지난번에 표본번호 틀려서 꽃눈 다시 셌잖아요. 오늘은 맛도 마찬가지예요.”

미정이 깨끗한 집게와 작은 컵을 가져왔다. 냄비에는 1부터 5까지의 번호가 있었고 해진은 보지 않은 채 다른 기호가 적힌 컵을 나열했다. 그가 대응표를 봉투에 넣어 접착테이프로 봉하자 박 여사가 손을 뻗었다.

“내 방식이 일등이면 오늘부터 표준이지?”

“한 번 맛본 걸로 표준은 못 정해요.” 보리가 향·식감·수율·시간을 적은 표를 펼쳤다. “다른 분도 다시 만들 수 있는지 봐야죠.” 박 여사는 일등을 받고 싶은 얼굴로 자기 냄비를 봤다. 보리도 정답 하나를 빨리 골라 서른네 예약병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저마다 붙든 주걱을 같은 방식으로 놓을 수 없었다.

옥순이 주걱을 내려놓았다. “내가 오래 했다고 그냥 올리자는 말은 취소하마. 그래도 내 솥도 봐 줘.”

“당연하죠. 번호 말고 솥을 봅니다.”

시식대에는 농가 사람들과 장터 상인 배정자, 미정의 공동주방 교대자 둘이 섰다. 해진은 자신이 보리와 가까운 사이라는 농담을 듣자 채점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제가 점수를 후하게 주면 관측자료도 의심받겠네요.” 보리는 “맛있는 걸 맛있다고 말할 때는 업무가 아니잖아요”라고 했다가, 미정이 짧게 헛기침하자 컵 번호를 읽는 데만 집중했다.

첫 컵은 향이 화려했지만 과육이 거의 사라졌다. 두 번째는 형태가 좋아 빵에 올릴 수 있었고 향이 약했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시큰했으나 끝에 복숭아가 길게 남았다. 배정자는 그 컵을 다시 먹고 “손님은 한 숟갈보다 두 번째 숟갈을 기억한다”고 했다. 옥순은 자기 것이라며 세 번째에 높은 점수를 줬다. 장씨도 세 번째가 자기 거라고 했다. 미정이 펜을 빼앗았다. “지금부터 소유권 주장은 봉투 개봉 뒤에 받겠습니다.”

수율표는 맛표와 다르게 나왔다. 완숙형은 손질할 때 즙이 빠지고 오래 끓여 향을 얻었다. 단단한 과육형은 병에 담을 조각이 많이 남고 노동시간도 짧았다. 보리는 두 결과를 곁에 놓았다. “우리는 향도 팔고, 씹히는 과육도 팔아요. 둘을 섞는 시험이 다음 순서겠네요. 오늘 어느 집이 이겼는지만 말하면 재료 절반을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방식이 반은 들어간다는 거지?” 옥순이 물었다.

“아직은 어떤 솥인지도 모르세요.”

봉투를 여는 손이 모두에게 보이게 보리가 테이프를 떼었다. 종이에 기호와 냄비번호가 드러났다. 향 점수 1위는 완숙을 자랑하던 옥순의 솥이 아니었다. 장씨의 것도 아니었다. 평소 말없이 낮은 가격만 적어 내던 다섯 번째 농가, 이씨가 낸 조각이었다. 이씨는 컵을 손에 쥔 채 “우리 건 저장 중에 향이 다 갔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다.

옥순은 잠깐 굳었다가 미정에게 “내 솥은 몇 위냐”고 물었다. “점수표는 다 공개해요. 다만 공개하는 건 방식과 결과지, 체면 순위가 아닙니다.” 보리가 말했다. 이씨는 비로소 웃었다. “그럼 우리 집 것도 제품에 들어갈 수 있겠네요.”

“들어갈 수 있게 내일 혼합시험을 할 거예요.”

시식대가 한산해지자 해진이 남은 컵 하나를 보리 앞으로 밀었다. 보리는 1위 컵인 줄 알고 먹었다가 눈을 찡그렸다. 미정이 옆에서 폭소했다. “그거 제일 단단한 솥입니다. 보리 씨가 아까 향 약하다고 쓴.”

해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번째 숟갈은 어떻습니까?”

보리는 천천히 다시 먹었다. 처음엔 밋밋했는데 씹히는 끝에 산뜻한 단맛이 있었다. “혼자 팔 맛은 아니어도, 다른 것과 붙이면 좋겠네.”

“누구처럼요?”

보리는 컵을 내려놓았다. “관측기사님 평가에는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부정하지 않고 세척대 쪽으로 컵을 가져갔다. 보리는 그가 돌아서자 자기 컵에 남은 과육을 한 번 더 씹었다. 미정이 물었을 때는 새 맛을 본다고 답했지만 해진이 다시 돌아오는 쪽부터 봤다. 박 여사는 돌아가기 전 자기 솥의 수율표를 다시 읽고 내일은 향 좋은 과육과 섞어 보자고 제안했다. 이씨도 손질에 쓴 시간을 빼먹지 말아 달라고 했다. 보리는 두 부탁을 같은 작업표에 적었다.

주방 벽에는 다섯 희망가격표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 아래 보리가 새 종이를 붙였다. ‘오늘 확인한 것: 향 1위와 수율 1위는 다른 솥. 내일 할 것: 둘을 섞어도 각 원물의 몫을 잃지 않는 방법.’ 이씨가 돌아오다 문틈으로 그 문장을 읽고, 자기 집 종이를 처음으로 가격표 옆에 당당히 붙였다. 보리는 그 종이가 다른 네 장과 나란히 걸린 것을 한동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