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5의 유언
열리지 않은 보상번호
자동보상 창구에서 사건번호가 막힌 진아리 일행이 응급치료비와 판정식 증거, 격막 흔적을 함께 지킨다.
사고 다음 날, 재단 자동보상 창구에는 번호표보다 의무실 팔찌가 먼저 쌓였다.
진아리의 것까지 세 개였다. 모두 C-12, 같은 사고 시각. 한 팔찌에는 귀 출혈 처치 기록이, 다른 두 개에는 낙상과 호흡 이상 관찰이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창구 단말은 세 사람의 이름 아래 똑같은 문장을 띄웠다.
〈적격 사건 없음.〉
리오 박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사람 셋이 동시에 다쳤는데 사건이 없다고요?”
창구 담당자는 손을 모은 채 말했다.
“의무실 임시 접수는 확인됩니다. 재난보장 사건번호는 자동 판정에서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기계 문장 읽어 달라고 온 게 아닙니다. 오늘 치료비와 쉬는 동안 생활비를 어떻게 할 건지 물었습니다.”
“정식 번호가 없으면 보장 계정에 비용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리오의 목소리가 커지자 뒤에 앉아 있던 부상자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아리는 그 모습을 보고 리오의 소매를 당겼다.
“여기서 다 말해야 해?”
리오가 즉시 단말에서 손을 뗐다.
“아니. 네가 원하는 만큼만.”
창구 뒤 대기 화면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처치 항목이 떠 있었다. 지나가는 주민도 읽을 수 있는 크기였다. 리오는 담당자에게 화면을 내리고 별도 상담실을 요청했다.
“세 사람 기록을 한꺼번에 열지 마세요. 같은 구역에 있었다는 것과 각자의 몸 상태를 공개해도 된다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담당자는 뒤늦게 대기 화면을 닫았다. 아리는 리오가 자신들을 증거처럼 데려온 것이 아닌지 어젯밤부터 마음 한쪽에 품고 있었다. 그가 먼저 공개 범위를 묻자 그 의심이 조금 줄었다.
작은 상담실에 들어간 사람은 아리와 리오, 권도한뿐이었다. 다른 두 부상자는 각자 설명을 듣고, 공동 대응에 이름과 사고 시각을 써도 되는지 따로 결정하기로 했다. 아리는 C-12와 임시 접수 사실은 공개해도 좋지만 청력검사 내용은 빼 달라고 했다.
“내가 약해졌다는 말이 싫어서가 아니야.” 아리가 말했다. “그 파형으로 사고 원인을 대신 설명할까 봐 그래.”
“그렇게 적을게.” 리오가 말했다. “당신을 대표사례로 세워 놓고 우리가 편한 말만 붙이지 않겠어.”
도한은 세 개의 빈 사건번호를 종이에 그렸다. 그 아래에는 어제 확인한 휴대 압력계 기록과 자동판정 화면을 따로 놓았다.
“먼저 두 문제를 분리하겠습니다. 중앙 센서가 어떤 원자료를 보냈는지, 그 자료를 보상 판정기가 어떤 방식으로 판단했는지.”
리오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분리하는 동안 병원비는 누가 냅니까?”
“그건 세 번째 문제로 따로 열어야 합니다.”
“따로 열자는 말로 또 미루면 안 됩니다.”
도한은 반박하지 않고 가온에게 운영자 준비금 규정을 요청했다. 화면에 여러 조항이 떴지만 자동보상 사건번호를 전제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리오는 첫 장부터 읽지 않았다. 긴급치료와 임시 사고접수에 관한 항목을 검색해, 책임 판단 전에도 다툼 없는 비용을 임시 계정에서 지출할 수 있다는 문장을 찾아냈다.
“여기 있네요.”
창구 담당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재단 승인자가 열어야 하는 계정입니다.”
“승인자가 필요하다는 말과 지급할 수 없다는 말은 다릅니다. 연결해 주세요.”
아리는 리오가 싸우는 동안 자기 단말에 찍힌 휴업 일수를 보고 있었다. C-12 출입이 정지된 만큼 당분간 정비수당도 끊길 수 있었다. 치료비보다 먼저 다음 달 방세가 떠오른 것이 부끄러웠다.
“생활비도 말해 줘.” 그녀가 작게 말했다.
리오는 되묻지 않았다.
“치료비만이 아닙니다. 사고 조사 때문에 일을 못 하는 기간의 임시 생계지원도 같이 검토해 주세요. 최종 재난보장 인정과는 구분해서요.”
재단 승인자와 연결되는 동안 도한은 자동판정식의 현재 버전을 열었다. 약관 화면에는 C-12 같은 생활구역에서 저압이 십 초 연속 확인될 경우를 사고 지표로 삼는다고 적혀 있었다. 반면 실제 판정기는 중앙 압력의 오 분 이동평균이 기준 아래에 머물렀는지를 보고 있었다.
아리는 두 화면을 번갈아 봤다.
“사십사 초가 짧아서 없어진 거예요?”
“오 분 평균에서는 사고 전후의 정상값과 섞입니다.” 도한이 말했다. “그래서 짧은 급락이 평균선 아래로 충분히 내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약관의 십 초는 왜 있어요?”
도한은 답 대신 버전 이력을 불러왔다. 판정기는 반년 전 갱신되며 평균창이 바뀌었다. 변경 사유에는 ‘일시적 센서 잡음으로 인한 오탐 감소’라고 적혀 있었다. 승인자 이름은 권한 제한 표시 뒤에 가려져 있었다.
리오가 화면을 읽었다.
“오탐을 줄인다고 실제 사람까지 지웠군요.”
“그렇게 결론내리기 전에 원자료를 봐야 합니다.” 도한이 말했다. “판정식이 잘못됐더라도 중앙 센서 자체가 평평한 값을 보냈는지는 별개입니다.”
“지금도 책임자 찾는 게 먼저입니까?”
“아닙니다. 돈을 먼저 열되, 누가 무엇을 바꿨는지는 섞지 말자는 겁니다. 센서값이 조작됐는지와 판정식이 보장을 좁혔는지는 다른 책임일 수 있습니다.”
리오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조사 중’이라는 말이 지급 칸으로 넘어오지 않게 하세요.”
재단 승인자가 영상으로 접속했다. 그는 사고번호가 없는 상태에서 준비금을 쓰면 나중에 회수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리오는 세 사람의 임시 접수와 당일 처치 내역 가운데 다툼 없는 부분을 먼저 분류하자고 요구했다.
“사건번호가 없어서 다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재난보장 대상이 아니면 개인 부담일 수 있습니다.” 승인자가 말했다.
“그래서 최종 보장금으로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운영 구역 안에서 발생해 의무실이 시행한 긴급 처치 비용을 준비금에서 먼저 지급하고, 조사 뒤 책임 계정으로 옮기자는 겁니다.”
아리는 ‘지급’이라는 말에 기뻐하지 못했다. 돈이 나오면 자신이 재단과 거래한 것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이 돈 받으면 나중에 말 못 하는 거 아니죠?”
리오가 승인자보다 먼저 아리를 봤다.
“권리 포기나 비밀 조항은 받지 않겠습니다.”
도한도 지급 요청서의 빈 칸을 확대했다. ‘책임 인정과 별개인 임시 지급, 조사 협조 및 이의제기 권리 유지’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아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각자 읽고 동의한 뒤 받게 해 달라고 했다.
“우리를 세 명 묶어서 한 번에 사인시키지 마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승인자는 마지못해 긴급치료비 임시 계정을 열었다. 생계지원은 근무중단 확인이 필요해 당일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틀 안에 각자의 근무표와 임시 출입제한을 확인하기로 했다. 아리는 ‘열렸다’는 말과 ‘확정됐다’는 말을 구분해 들었다. 치료는 이어지지만 재난보장 사건번호는 여전히 빈칸이었다.
도한은 판정식과 원자료 문제로 돌아갔다. 가온이 중앙 센서 저장소에서 사고 시각의 파일을 불러왔다. 처음 화면에는 초록색 평탄선만 보였다. 도한이 원자료 형식을 요청하자 가온은 권한 확인을 거쳐 개별 샘플과 품질표시를 분리해 띄웠다.
아리는 휴대계에서 보았던 하강 모양을 찾았다. 그러나 중앙 센서의 개별 샘플은 같은 구간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대신 몇 줄의 패킷 시각이 일정하지 않았다. 도착이 늦은 값과 앞의 값을 반복 사용한 표시가 섞여 있었다.
“이게 조작입니까?” 리오가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도한이 말했다. “통신 지연으로 이전 값을 유지했을 수도 있고, 저장 과정에서 누락됐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값을 바꿨다는 증거는 지금 없습니다.”
“그럼 판정식만 잘못된 겁니까?”
“그것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약관과 다른 시간창을 쓴 사실은 보이지만, 누가 승인했고 어느 청구부터 적용됐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리는 답답해서 손바닥으로 귀를 눌렀다. 휴대계가 틀리지 않았다는 데 하루가 걸렸고, 이제는 중앙 센서와 판정식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지울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은 셋인데 문제는 왜 자꾸 늘어요?”
도한이 화면을 닫지 않은 채 말했다.
“처음부터 여러 문제였는데 한 문장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격 사건 없음’이라는 문장으로요.”
가온이 지난 여덟 달의 저압 경고 열일곱 건을 띄웠다. 그 옆에 현재의 오 분 평균식을 소급 적용한 모의 판정이 따로 열렸다. 이 계산에서는 어느 경고도 사고 기준을 넘지 못했다. 도한은 실제 당시 판정 내역이 아니라는 표제를 크게 띄웠다. 반년 전 갱신보다 앞선 두 달의 경고는 옛 판정식과 당시 접수 기록을 따로 대조해야 했다.
리오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열일곱 번이나 같은 사고를 숨긴 겁니까?”
“아니요.” 아리가 먼저 말했다.
두 남자가 그녀를 봤다.
“센서 점검할 때 짧게 뜨는 경고도 있어요. 출입문 동작이나 현장 기기 이상일 수도 있고. 전부 C-12 같은 감압이라고 하면 내 기록도 같이 약해져요.”
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일곱 건은 조사할 대상이지, 열일곱 번의 사고가 아닙니다. 구역, 지속시간, 현장 신고와 부상 여부를 따로 봐야 합니다.”
리오는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알겠습니다. 조합 게시문에는 ‘과거 경고 열일곱 건의 보상 누락 가능성 조사’라고만 쓰죠. 피해자가 확인되지 않은 사건에 이름을 만들어 붙이지 않고.”
아리는 안도하면서도 부담을 느꼈다. 어제까지 자기 계측기 하나를 믿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제는 열일곱 개의 경고와 앞으로 받을 모든 청구가 자기 사고 뒤에 줄을 선 것 같았다.
“나를 첫 번째 피해자라고 부르지 마.”
리오는 바로 대답했다.
“부르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C-12 사고의 당사자이고, 공개 범위도 당신이 정합니다. 다른 경고의 사람들은 확인되기 전까지 각자 자기 자리 그대로 두죠.”
상담실 문이 열리고 창구 담당자가 세 개의 새 임시 지급번호를 가져왔다. 사건번호는 아니었다. 그래도 의무실 비용이 개인 계정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단 멈췄다. 아리는 자기 번호만 받고 나머지 두 장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때 가온의 알림이 떴다.
〈C-12 격막 교체 작업이 보류되었습니다. 현장 보존 여부 결정이 필요합니다.〉
아리의 몸이 먼저 일어섰다. 리오가 팔을 잡으려다 멈추고 물었다.
“갈 수 있어?”
“의무실에서 허용한 범위까지만. 격막을 갈아 버리면 압력이 어디로 빠졌는지 못 봐.”
도한이 현장 화면을 열었다. 파열된 격막 가장자리에는 흰 서리선이 복도 방향으로 길게 남아 있었고, 정비팀은 새 부품과 공구를 이미 점검구 앞에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교체를 막는다고 환기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도한이 말했다.
“알아요.” 아리가 대답했다. “그래서 원래 걸 떼지 않고 살릴 길을 찾으러 가는 거예요.”
그녀는 보관봉투 속 휴대 압력계를 허리에 차지 않았다. 오늘 현장에 필요한 것은 자기 숫자를 한 번 더 재는 일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격막의 흔적과 주민들이 쓸 공기를 함께 지키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