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현관턱 위의 응급실
오세현이 노영숙의 실제 생활 동선에 맞춰 산소튜브와 가구 위험을 표시하고 재택돌봄 조건을 마련한다.
다음 날 오후, 오세현은 노영숙의 집 현관 앞에 서서 종이 한 장을 네 번 접었다 폈다.
‘집에서 지낼 수 있는 조건.’
밤새 만든 표에는 연락 기준, 산소기기 확인, 보호자 역할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병원에서라면 누가 읽어도 안전계획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영숙이 분명히 말했다. 병원 말고 이 집 기준으로 적어 오라고.
문하진이 세현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제목 아래 첫 문장이 뭔데요?”
“산소포화도 측정—”
“탈락.”
“읽기도 전에요?”
“현관에 서 있는데 벌써 병실을 만들고 있잖아요.”
문이 열렸다. 영숙은 어제보다 숨이 길었지만 코의 산소튜브는 여전히 팽팽하게 현관 쪽으로 당겨져 있었다.
“둘이 시험 보러 왔어?”
“제가 탈락했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들어와서 재시험 봐요.”
세현은 허락을 받고 현관턱을 넘다가 발을 멈췄다. 문턱 모서리에 투명한 튜브가 눌려 있었다. 영숙이 거실 의자에서 화장실로 움직일 때 현관 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줄이었다. 어젯밤 탁자 다리에서 빼낸 곳과는 달랐다.
“이 줄, 원래 이렇게 지나갔습니까?”
영숙이 내려다봤다.
“농축기 놓을 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조금 옮겨도 될까요?”
“안 돼. 콘센트가 저쪽뿐이야. 멀티탭 늘어뜨리는 게 더 위험해.”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구 배치를 바꾸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영숙에게 평소 움직이는 길을 보여 달라고 했다.
“환자를 걷게 하겠다고?” 하진이 물었다.
“검사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제 숨이 차기 전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보고 싶어요. 힘들면 바로 멈추겠습니다.”
영숙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채영이 팔을 잡으려 하자 손을 뿌리쳤다.
“내가 걷는 걸 보라잖니. 네가 끌고 가는 걸 보자는 게 아니고.”
거실 창가에서 화장실까지는 열 걸음 남짓이었다. 그러나 낮은 장식장 두 개가 복도를 좁혔고, 산소튜브는 현관턱을 돌아 첫 번째 장식장 모서리를 스쳤다. 영숙이 두 번째 장식장 앞에서 몸을 옆으로 틀자 줄이 발목 뒤로 들어갔다. 세현은 손을 뻗지 않고 말했다.
“멈추세요.”
영숙이 멈췄다. 하진이 튜브를 발뒤꿈치에서 빼내고 호흡 상태를 확인했다. 영숙은 숨을 고르며 장식장 위 가족사진을 바로 세웠다.
“저것 때문에 좁아요.” 세현이 말했다.
“사진 때문에?”
“장식장 때문에요.”
“사진은 공중에 세워 두나?”
채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엄마, 작은방으로 옮기자. 어제도 내가 치우자고 했잖아.”
“안 치워.”
“넘어지면 어떡해.”
“넘어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잖아.”
“천천히 걷다가 숨찼잖아!”
목소리가 부딪치자 영숙의 호흡이 다시 짧아졌다. 세현은 숫자를 재기 전에 의자를 가져와도 되는지 물었다. 영숙이 고개를 끄덕이자 복도 끝 의자를 옮겼다. 하진은 호흡을 보며 둘의 말을 잠시 멈추게 했다.
세현은 장식장 위 사진들을 보았다. 젊은 영숙이 교복 입은 딸과 찍은 사진, 남편의 영정에서 옮겨 온 작은 독사진, 어린 손녀가 종이왕관을 쓴 사진. 물건을 치운다는 말은 세현에게 통로 폭을 넓히는 일이었지만 영숙에게는 사람들의 자리를 빼는 일이었다.
“전부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채영이 어이없다는 듯 봤다.
“의사 선생님이 안전하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르신이 자주 보는 사진은 남기고, 통로가 가장 좁아지는 장식장 하나만 다른 벽으로 옮기면 어떨까요?”
영숙은 첫 번째 장식장을 가리켰다.
“저건 옮겨도 돼. 안에는 겨울 이불보뿐이니까. 두 번째는 안 돼.”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남편 제삿상 그릇이 들어 있어. 내가 찾을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해.”
세현은 종이의 첫 항목을 줄로 지웠다. ‘이동경로 장애물 제거’를 ‘첫 장식장만 거실 벽으로 이동, 둘째 장식장은 유지’로 바꿨다.
“내가 정한 것도 쓰네.” 영숙이 말했다.
“그래야 이 집 계획이죠.”
채영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혼자 장식장을 밀지 않았다. 세 사람이 안의 물건을 먼저 꺼내고, 영숙이 사진 위치를 정한 뒤에야 거실 벽으로 옮겼다. 통로는 사람 하나가 정면으로 지날 만큼 넓어졌다.
산소튜브 문제는 더 까다로웠다. 벽면을 따라 고정하면 문턱에서 눌리지 않지만 영숙이 거실을 가로지를 때 줄이 모자랐다. 세현은 기기 자체를 옮기자는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하진은 대여업체에 전화해 현재 튜브 길이와 권장되는 연결 방법, 기기 점검 가능 시간을 확인했다. 임의로 관을 이어 붙이지 않고, 업체가 가져올 고리와 길이에 맞는 새 튜브를 쓰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 기사 보낸대요.” 채영이 통화를 마치고 말했다.
“기사가 올 때까지는 현관턱에 임시 덮개를 올려놓겠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영숙이 눈을 가늘게 떴다.
“테이프 덕지덕지 붙이지 마. 장판 뜯어지면 당신이 물어 줄 거야?”
“뜯기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세현은 가방에서 밝은색 천 고정띠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고정띠는 튜브를 눈에 띄게 만들 수 있지만 문을 여닫을 때 눌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현관문이 움직이는 범위를 몇 번 확인했다. 결국 임시 덮개보다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튜브를 벽 고리에 걸어 올리는 편이 나았다.
“그럼 깜빡하면요?” 채영이 물었다.
“현관 손잡이에 표식을 답시다.”
영숙이 웃었다.
“문 열기 전에 줄부터 보라고?”
“네. 집에 오는 사람이 해야 할 일로요. 어르신한테 조심하라고만 하지 않고.”
세현은 빨간 끈에 ‘산소줄 확인’이라고 적은 작은 표를 매달았다. 현관을 열려면 표가 먼저 손등에 닿았다. 영숙은 직접 문을 열고 닫아 보았다.
“성가셔서라도 보겠네.”
“성공입니다.”
“의사가 하는 일이 점점 잡역부가 되는구먼.”
“첫날보다 맡은 범위가 또 넓어졌습니다.”
하진은 웃으면서도 농축기의 작동기록을 확인했다. 기기 출력이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전날 증상 시각과 겹치는 것은 튜브가 눌린 동선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호흡곤란의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튜브 문제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지만, 어르신 상태 자체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진이 설명했다. “오늘 편해졌다고 어제 정한 연락 기준을 없애지는 않겠습니다.”
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친 데만 믿고 사람을 안 보면 안 된다는 거지.”
세현은 밤새 만든 표를 식탁 위에 펼쳤다. 영숙이 첫 줄부터 읽었다. 산소포화도 수치가 지나치게 크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숫자만 보고 전화해야 해?”
“아닙니다. 측정이 반복해서 낮거나 평소와 다르면서 숨이 더 힘들 때 참고하는 값입니다. 말씀을 잇기 어렵거나 의식이 흐려지는 변화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써.”
세현은 ‘수치 기준’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내가 느끼는 변화와 함께 볼 것’이라고 썼다. 영숙은 ‘내가’ 밑에 두 줄을 그었다.
“딸이 보는 것도 써 줘. 내가 정신없으면 얘가 봐야지.”
채영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자기 칸에 ‘부르면 평소처럼 대답하는지, 문장을 이어 말할 수 있는지, 새 통증이 있는지’라고 적었다. 필체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두 시간 뒤 대여업체 기사가 와서 영숙이 보는 앞에서 고리와 새 튜브를 설치했다. 문을 열 때 줄을 걸어 올리는 방법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해 본 뒤, 하진은 마지막으로 세현에게 물었다.
“집에서 지내기 위한 조건 중에 아직 빠진 건요?”
세현은 거실을 둘러봤다. 통로와 튜브, 전화번호, 약. 병원에서는 시설과 인력으로 이미 주어지는 것들이 여기서는 가족의 시간과 집 구조 위에 놓여 있었다.
“밤에 누가 연락을 받는지. 그리고 기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 책임으로 고치는지요.”
채영이 대여업체 기사가 남기고 간 서류봉투를 식탁에 올렸다. 고리 설치와 새 튜브 교체 비용은 영수증에 따로 적혀 있었다. 그녀가 대여계약서를 펼치자 ‘가정 내 관리 책임은 사용자 및 가족에게 있다’는 조항이 굵은 글씨로 보였다.
“이거 봐요.” 채영이 말했다. “줄이 눌리든 기계가 멈추든 다 우리 책임이라는 거잖아요. 기사도 서명만 받고 갔어요.”
하진이 계약서를 읽었다. 정기점검과 기기 고장 때의 업체 책임은 뒷장에 있었지만, 앞장의 굵은 문구만 보면 모든 부담이 가족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오늘 설치 상태와 설명받은 내용을 영수증 뒤에 적어 두죠. 업체에도 조항 범위를 확인하겠습니다.”
“보험 처리되는 건 없어요?” 영숙이 물었다.
“바로 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기기 대여와 소모품, 집 안 안전개선 비용이 각각 다를 수 있으니 확인해서 나눠 적겠습니다.”
영숙은 혀를 찼다.
“집에서 살겠다고 하니까 사람 사는 값보다 줄 값이 먼저 붙네.”
그 말 앞에서 세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자기 비용이 아닌 것을 대신 아파하는 얼굴은 영숙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누가 내야 하는지 흐리지 않겠습니다.”
영숙은 그를 잠시 보다 종이를 돌려주었다.
“재시험은 통과. 아직 의사는 말고, 우리 집 길 안내원으로.”
세현은 종이를 받아 접지 않았다. 현관으로 나갈 때 빨간 표식이 손등을 쳤다. 그는 튜브를 벽 고리에 올리고 나서 문을 열었다.
비는 그쳤지만 복도 끝 창에는 성에가 엷게 끼기 시작했다. 세현은 내일 다시 오면 영숙의 숫자보다 먼저, 그녀가 오늘보다 문장을 길게 말하는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