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상업 미스터리 3화

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두 번 눌린 손도장

같은 손도장이 남은 가입쪽지를 조사한 민연화가 필경사의 대리 날인과 수상한 문서 봉투의 사연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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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방 열쇠는 한 번에 돌아가지 않았다.

연화가 손목에 힘을 주자 허만복이 뒤에서 혀를 찼다.

“들어서 돌려야지. 몇 해를 드나들어도 그것을 몰라.”

그녀는 문짝을 조금 들어 올렸다.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빗장이 풀렸다. 방 안에는 밤새 가둔 먹 냄새가 남아 있었다. 창호를 밀자 바닥에 햇빛 네모가 놓였다.

연화는 서랍 셋 가운데 맨 아래 것을 열었다. 부조계 가입쪽지는 월별로 묶여 있었다. 위에 눌린 것부터 꺼내면 손은 편했겠지만 순서가 흐트러질 터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묶음 전체를 받쳐 들었다.

“찾는 것만 빨리 찾아라.”

만복은 문을 열어 둔 채 서 있었다. 대청에는 아직 사람이 남아 있었다. 떠나는 사람마다 주인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쌀은 고맙다는 말과 계금은 언제 나오느냐는 말이 같은 입에서 나왔다.

연화는 그 목소리들을 듣고서야 붓 끝을 물에 담갔다. 서두르고 싶을 때일수록 마른 붓으로 이름을 적었다가는 나중에 자기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방칠이 아내의 이름이라고 댄 이름이 나온 것은 두 번째 묶음에서였다. 가입쪽지의 주인은 그 아내였고, 방칠은 지금 계금을 청구하러 온 사람이었다. 연화는 둘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따로 꺼낸 종이에 계원 이름과 오늘 찾아온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그녀는 쪽지를 햇빛이 직접 닿지 않는 자리로 옮겼다. 옆에 다른 두 사람의 것을 놓았다. 가운데 쪽지는 접힌 자리가 유독 희었다.

계원 이름 셋. 그 몫을 청구하는 사람 셋. 가입쪽지에 남은 손도장 셋.

연화의 붓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복단 아주머니.”

문턱에 기대 있던 복단이 몸을 일으켰다.

“눈이 침침한 사람을 왜 불러.”

“이것 좀 봐주세요.”

“글씨는 네가 잘 보잖아.”

“글씨 말고요.”

복단은 허리를 굽혔다. 세 손도장 가장자리에 마른 먹이 엷게 번져 있었다. 첫 도장은 옆으로 누웠고, 둘째는 바로 섰다. 셋째는 끝이 잘려 있었다. 얼핏 보면 다른 모양이었다.

연화는 제 손톱으로 허공에 작은 반달을 그렸다.

“여기가 셋 다 비어 있습니다.”

복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먹이 닿지 않은 가느다란 틈이 엄지 끝의 같은 자리로 휘었다. 흉터처럼 보였다. 종이를 돌려 놓자 기울어진 도장의 틈도 같은 쪽을 향했다.

“한 사람이 찍은 게냐?”

만복이 문을 닫았다.

연화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도장을 몇 장 본 눈으로 세상의 모든 손가락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먹을 덜 묻힌 곳이 우연히 비슷하게 남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름 아래 같은 자리가 거듭 비어 있는 이유는 물어야 했다.

“이 쪽지들을 누가 썼는지는 압니다.”

그녀는 길게 빠진 끝 획을 짚었다.

“조생원을 불러 주세요.”

***

조생원은 붓집보다 장부를 먼저 가슴에 안았다.

심부름꾼을 따라 들어온 그는 방 안의 사람 수를 헤아리듯 눈을 움직였다. 만복이 방석을 밀자 앉기 전에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날이 덥지는 않았다.

“내 글씨가 어디 틀렸습니까?”

연화는 세 쪽지를 보여 주었다.

“글씨는 잘 읽힙니다.”

“그럼 계원이 이름을 잘못 불렀나 보지요.”

조생원은 웃었다. 아무도 따라 웃지 않자 입꼬리가 느리게 내려갔다.

“직접 듣고 쓰셨습니까?”

연화가 물었다.

“하루에 쓰는 종이가 몇 장인데 일일이 기억하겠소.”

“그럼 기억나는 데까지만요. 이 세 분이 같이 오셨습니까, 따로 오셨습니까?”

그는 장부 모서리를 쓸었다. 연화는 그의 엄지에 먹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손가락을 내놓으라고 하면 지금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자신의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조생원은 글씨를 팔아 살았다. 누군가의 손을 종이 위로 끌어다 눌러 버리면 그날부터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 주는 일도 모욕이 될 터였다.

“다시 베낀 것이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종이가 상했다 하기에. 글씨가 보이는데 못 옮겨 줄 이유가 있소?”

만복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연화는 주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필경사가 낡은 종이를 베낀 일이라면, 객주의 궤짝까지 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원래 종이는 어디 있습니까?”

“돌려줬지요.”

“누구에게요?”

조생원의 손이 멈췄다.

밖에서 방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붙들어 둘 셈이냐고, 객주가 사람을 굶긴다고 했다. 대청의 밥그릇이 치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복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조생원을 보았다.

“나가서 사본 잘못 쓴 것이라고 하시오. 다음에 원본을 가져오라 하고.”

연화는 쪽지를 거두지 않았다.

“옮긴 글씨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손도장은 어떻게 옮기셨습니까?”

조생원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

만복은 연화를 창가로 불렀다.

두 사람이 몇 걸음 옮겨 선다고 말이 들리지 않을 방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인은 등을 돌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손님 앞에서 산원과 다투는 꼴만은 피하려는 오래된 버릇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대신 썼다는 거잖느냐.”

“대신 쓰는 것과 대신 찍는 것은 다릅니다.”

“손이 없는 사람은? 손이 다친 사람은? 글 모르면 평생 계에 들지도 말아야 해?”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이 든 계원에게 쪽지를 읽어 주고 그 뜻을 확인한 뒤 다른 이가 대신 적어 준 일은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 부탁으로, 누가 대신했는지 남기는 거고요. 그런데 여기에는 셋 다 계원 본인이 찍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찾아온 가족이 아니라, 길을 떠났다는 그분들 말입니다.”

만복의 턱이 굳었다.

“틀렸으면 고치면 돼. 객주 문 앞에서 위조니 뭐니 소리 날 일이냐.”

연화는 창호 틈을 보았다. 아까 매듭을 찾던 아이가 마당에서 밥풀 묻은 손을 어머니 치마에 닦고 있었다. 여인은 나무패가 젖을까 봐 그 손을 피했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세 사람 몫을 지금 내주면, 저분들은 뭘 받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나중에 잘못 준 걸 알면 돌려받으면 되지.”

“제가 받으러 갈까요?”

만복이 그녀를 보았다.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연화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주인을 이기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이 방에 남은 쌀을 셀 때마다 끝에 남는 빈 칸을 자신만 보고 싶지 않았다.

만복은 한동안 창밖을 보았다. 아이 어머니가 대청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인을 본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인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뒤늦게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문밖에는 아직 떠들지 마라.”

그가 말했다.

“확인 안 된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연화는 돌아섰다. 만복이 문을 열고 심부름꾼에게 물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나가라는 말 대신이었다.

***

조생원은 복단이 밀어 준 물그릇을 받지 않았다.

“내가 찍었소.”

연화가 자리에 앉기 전이었다.

“먼 길에서 손을 다쳤다고 했소. 원래 쪽지는 맞으니 먹만 찍어 달라더군. 나는 돈을 떼먹은 적 없소.”

“세 장 모두요?”

그는 대답 대신 엄지를 폈다. 굽은 흉터가 손끝을 가로질렀다. 오래전 종이를 자르다 생겼다는 말을 연화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웃으며 보여 줄 때에는 이름보다 손이 먼저 남는 팔자라고 했었다.

지금 조생원은 그 손을 어디 둘지 몰랐다.

연화는 더 가까이 내밀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대로 종이 옆에 적었다. 조생원이 그것을 보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걸 누구한테 보일 거요?”

“이 돈을 맡긴 분들께 설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말 안 했소.”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복단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연화는 붓을 들고 기다렸다. 조생원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밀린 듯 등을 벽에 붙였다.

“그 사람이 시킨 것이지. 내 생각이 아니오.”

그는 이번에는 연화가 아니라 만복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서 먹을 삯을 받으란 말입니까.”

만복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생원은 그 침묵을 거절로 들었는지 장부를 다시 끌어안았다.

연화가 붓을 내려놓았다.

“오늘 해 지기 전까지, 원래 쪽지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을 어디서 찾으라고.”

“그럼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해 주세요. 대신 누구에게 받았는지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모르시는 이름을 만들어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조생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죄를 없애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연화에게 그럴 힘은 없었다. 다만 지금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쓰게 만들면 다른 쪽지 한 장이 더 생길 뿐이었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방칠이 대청을 가로질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조생원이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연화는 그것을 보았다.

“저분이 가져왔습니까?”

“아니오.”

대답은 빨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생원이 말을 이었다.

“문서 봉투였소. 관아에서 돌리는 것 같은. 나는 그것 보고…… 제대로 된 일인 줄 알았소.”

복단이 연화를 보았다. 매듭 안에서 보았던 푸른 올을 두 사람 다 떠올린 듯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같은 빛의 끈도, 비슷한 봉투도, 같은 사람이 가져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봉투는 남아 있습니까?”

조생원은 대답하지 않고 품속 장부를 펼쳤다.

***

봉투는 장부 표지 안쪽에 접혀 있었다.

조생원은 빈 종이를 버리지 않았다. 붓을 시험하거나 셈을 적을 자리가 어디든 필요했다. 봉투 뒷면에도 품삯과 쌀값으로 보이는 숫자가 여러 번 지워져 있었다.

연화는 그의 허락을 받고 그것을 폈다.

모서리에 작은 붉은 자국이 겹쳐 찍혀 있었다. 만복이 몸을 숙였다. 그는 지난달 관아에서 돌려받은 통행 관련 문서를 서랍에서 꺼냈다. 고쳐 쓴 날짜 옆에 비슷한 작은 인장이 있었다.

“날짜 바로잡았다고 찍는 것이야.”

주인이 말했다.

연화는 두 자국을 나란히 보았다. 한쪽은 번져 있어 획이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봉투의 접힌 선이 붉은 자국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어디에서 쓰던 봉투를 다시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직 이 봉투가 관아의 명령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조생원이 그렇게 믿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몰랐다.

“이걸 보고 확인도 안 했느냐?”

만복이 물었다.

조생원은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그 질문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대신 봉투 뒤에 적힌 품삯을 보았다. 세 사람의 이름을 옮겨 쓴 값은 그의 하루 밥값보다 조금 많았다.

그 적은 돈으로 종이 셋이 만들어졌다. 그 종이 셋이 객주에 들어오자 궤짝 하나가 흔들렸다.

“해 지기 전에 다시 오시오.”

만복이 말했다.

“달아나면 그때는 내가 찾을 것이고.”

조생원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복단이 팔꿈치를 받쳤다. 문턱을 넘는 그의 오른손은 소매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연화는 세 쪽지의 이름 밑에 적힌 손도장을 덮지 않았다. 글씨를 대신 쓴 사람은 알게 되었지만, 이 종이가 누구의 뜻을 대신하고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심부름꾼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방칠이라는 분, 돌아가셨습니다.”

“어느 길로?”

복단이 물었다.

“서쪽 골목으로요. 신도 새로 갈아 신고요.”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그는 북쪽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다고 했다.

복단은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

“종이는 네가 보거라.”

그녀가 치맛자락을 걷으며 말했다.

“나는 저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나 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