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폐업딱지 아래의 오븐
윤보리와 류미정이 폐업 작업장의 필수 수리와 나중 수리를 나눠 최소 비용으로 가공 재개 가능성을 찾는다.
다음 날 아침, 류미정은 윤씨 가공작업장 셔터에 붙은 빨간 체납 고지를 보자마자 모서리를 접어 삼각형을 만들었다.
“뭐 하세요?” 윤보리가 물었다.
“전기 끊겼다는 표시가 잘 보이게.”
미정은 반대쪽 모서리도 접더니 종이를 이마에 얹었다. 체납 금액이 정면에 박힌 우스꽝스러운 종이모자가 됐다.
“그리고 위생모 값 하나 절약.”
보리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저걸 쓰고 점검한다고요?”
“전기는 없어도 체면은 남았다는 걸 보여 줘야지.”
최옥순이 셔터 열쇠를 돌리며 혀를 찼다. “체면이 제일 먼저 나간 것 같은데.”
미정은 청도 읍내에서 작은 빵집과 마을 공동주방을 함께 운영하는 제빵사였다. 보리가 서울로 떠나기 전 몇 번 마주쳤지만 제대로 말한 적은 없었다. 미정은 인사보다 먼저 손전등, 가스 누설 검지기, 흰 천을 작업대에 늘어놓았다.
“분명히 합시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빵 안 굽고, 복숭아 안 먹고, 전원 안 올립니다. 쓸 수 있는 공간인지 보는 날이에요.”
강해진은 외부 냉동보관처에서 받은 서류봉투만 가져왔다. 전년도에 수확해 세척·절단한 뒤 냉동 맡긴 가공용 원물 여섯 상자의 입고표, 월별 온도기록, 보관료 미납 내역이었다. 전날 소량 해동 표본은 상태 확인 뒤 다시 냉동하지 않고 보관처의 폐기 대기 용기에 격리했다고 했다.
보리가 물었다. “한 번 녹인 걸 다시 넣은 건 아니지?”
“아니. 표본은 표본대로 사용 보류. 나머지 여섯 상자는 계속 영하 십팔 도 이하였어.”
“맛도 안 봤고?”
“네가 안 봤잖아. 나도 안 봤어.”
미정이 서류를 넘겼다. “잘했네. 향 난다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냉동 상태 좋다고 제품에 바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원물 이력과 미생물 검사, 해동 뒤 상태를 따로 봐야지.”
작업장 안은 햇빛이 닿는 셔터 틈만 밝았다. 전기가 끊긴 냉장고 문에는 ‘작년 10월 비움’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안은 비어 있었고, 말라붙은 오염 자국만 선반 모서리에 남았다. 봄철 생복숭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깥 밭에는 꽃만 피어 있었다.
보리는 벽의 계량스푼을 내렸다. “이건 닦으면 쓸 수 있어요.”
미정이 손전등으로 손잡이 이음새를 비췄다. “녹이 안쪽까지 갔는지 보고.”
“스테인리스예요.”
“스테인리스도 영생은 아니야.”
보리는 자기 물건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도 새 팀장이 오면 보리의 시제품을 펼쳐 놓고 이름부터 바꿨다. ‘집착을 버리고 상품 관점에서 보자’는 말 뒤에 남은 것은 보리의 배합표에서 보리 이름이 지워진 파일이었다.
“제가 이 작업장을 썼어요. 뭐가 되는지는 알아요.”
“몇 년 전에?”
“십 년쯤.”
“그동안 배수구는 십 년 늙었고, 가스관도 십 년 늙었고, 네 기억도 십 년 예뻐졌겠지.”
미정은 계량스푼을 버리지 않았다. ‘세척 후 표면 확인’ 상자에 넣었다. 보리는 그제야 그가 없애려는 게 아니라 분류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오븐은 더 심각했다. 문을 열자 안쪽 철판이 붉게 부식돼 있었고 고무 패킹은 손가락으로 눌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정은 전원을 넣지 않은 채 후면 배선을 보고, 가스 차단밸브를 잠근 상태로 검지기를 댔다.
“이건 폐기.”
보리가 바로 물었다. “수리 견적도 안 받고?”
“패킹, 온도조절기, 내부 철판, 배선까지 갈아야 해. 식품용 중고 오븐보다 비쌀 가능성이 커. 그래도 비교 견적은 받자. 폐기 확정은 그다음.”
옥순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냉해 보험금 나오면 하나 살 수 있지 않을까?”
미정의 종이모자가 삐뚤어졌다. “안 됩니다.”
“왜 또 안 된대?”
“작물 피해 보전이 작업장 오븐 교체비로 자동 변하는 게 아니잖아요. 더구나 아직 보상도 확정 안 됐고. 올해 꽃 피해, 예전 전기료, 과거 대출, 앞으로 설비비를 한 솥에 끓이면 숫자만 달콤해져요.”
보리는 작업대에 종이를 네 장 폈다. ‘올해 냉해’, ‘전년도 냉동 원물’, ‘기존 채무’, ‘작업장 재개’. 어제 차 안에서 그은 굵은 선을 네 칸으로 늘렸다.
옥순이 한숨을 쉬었다. “나갈 돈은 한 주머니인데.”
“그래도 이름은 나눠야 해요.” 보리가 말했다. “그래야 어느 돈으로 뭘 할지 정할 수 있어요.”
미정이 그를 한번 보고 웃었다. “서울에서 서류는 배웠네.”
“디저트를 배웠습니다.”
“그게 서류 없이 팔리던?”
보리는 대꾸 대신 흔들리는 냉각 선반을 잡았다. 해진이 공구를 들려 하자 먼저 손을 뻗었다.
“내가 할게.”
“확인하고 조여.”
보리는 선반을 눕혀 풀린 나사를 조였다. 흔들림은 멎었지만 미정은 곧장 사용 가능 표시를 하지 않았다. 직접 눌러 보고 녹이 이음새 안쪽까지 번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흰 표를 붙였다. 반대편의 갈라진 나무 작업판에는 검은 표가 붙었다.
“오래 썼다는 이유로 살릴 수는 없네.” 보리가 말했다.
“반대로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버릴 것도 없고.” 미정이 냉각 선반을 두드렸다.
그 한 번의 선택 뒤에는 분류가 빨라졌다. 배수와 전기처럼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은 노란 칸, 세척 뒤 쓸 수 있는 도구는 흰 칸, 식품이 닿아서는 안 되는 물건은 검은 칸으로 갔다. 보리는 같은 결과를 목록과 요약표에 두 번 옮기지 않고, 물건에 붙인 색표를 네 장의 비용표와 바로 연결했다.
“생각보다 덜 망했네.” 옥순이 말했다.
“망한 걸 예쁘게 말하지 마세요.” 보리가 대꾸했다. “다만 전부 버릴 필요는 없네요.”
미정은 종이모자를 벗어 ‘기존 채무’ 칸 옆에 놓았다. “전기료 체납부터 해결해도 전기안전 점검 전에는 올리면 안 돼요. 내일 기사 부를 수 있고, 오븐 견적은 오후에 받겠습니다.”
옥순이 냉동 원물 서류를 가리켰다. “그 여섯 상자로 뭐라도 만들어 팔면 급한 돈이 되지 않겠나?”
“아직 재료라고 부르지 맙시다.” 미정이 말했다. “현재는 외부 창고에 보관된 전년도 냉동 가공원물. 검사와 해동시험 전에는 판매계획도 레시피도 없습니다.”
보리는 전날 해동된 소량 표본 사진을 열었다. 조각은 물러지고 지퍼백 안쪽에 얼음 결정이 붙어 있었다. 사진만 보면 쓸모없어 보였다. 반대로 입고표의 온도선은 깨끗했다. 어느 쪽도 혼자서는 답이 아니었다.
“해동시험은 어디서 해요? 여긴 전기도 물도 없는데.”
“내 공동주방.” 미정이 말했다. “단, 여섯 상자를 다 꺼내지 않고 각 입고일에서 밀봉 소포장 하나씩만. 냉동 상태로 운반하고 해동 시간, 중량 감소, 색, 조직, 산도부터 봐. 맛은 안전 확인 뒤.”
해진이 보관기록 두 묶음을 가리켰다. 여섯 상자는 두 날짜로 나뉘어 있었다. “첫 입고 네 상자, 둘째 입고 두 상자. 전날 표본은 첫 입고 쪽이었어.”
“그 표본은 재사용하지 말고.” 보리가 말했다.
“이미 사용 보류라고 했어.”
“두 번 말해야 마음이 놓여.”
“세 번째부터는 확인료 받을게.”
미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내 공동주방에서 연애 대사하면 대관료 두 배야.”
“연애 아닙니다.” 둘이 동시에 말했다.
옥순은 어제와 똑같은 장면을 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작업장 밖에서 차량 한 대가 멈췄다. 오븐 수리기사가 예상보다 일찍 온 것이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내부를 보고 부품 목록을 적더니, 수리비가 같은 용량의 검증된 중고 오븐보다 삼십 퍼센트쯤 비쌀 거라고 말했다. 보리는 견적서 두 장을 요청했다. 수리했을 때와 철거했을 때. 기사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나눠 써 주었다.
“추억값은 견적에 없습니까?” 미정이 물었다.
“그건 고객이 알아서 더하셔야죠.”
보리는 오븐 문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고등학생 때 태운 타르트 냄새가 남아 있을 리 없는데도 순간 코끝이 달아졌다. 그는 문을 닫았다.
“폐기 후보로 두죠. 내일까지 다른 중고 견적 하나 더 받고 결정해요.”
옥순이 놀랐다. “네 어머니한테 안 물어봐도 되겠어?”
“물어봐야죠. 그래서 확정 안 했잖아요.”
서울에서는 자기 레시피가 자기 없는 자리에서 확정됐다. 보리는 같은 방식으로 집의 물건을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농협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뒤로 버스 안내방송이 들렸다.
“작업장 열었다며.”
보리는 오븐과 수리 견적서를 화면에 비췄다. “이건 고치는 것보다 중고로 바꾸는 게 쌀 수 있대. 그래도 엄마가 보고 정해야 할 것 같아서.”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오븐 네 아버지가 중고로 업어 와서 문짝을 세 번 고친 거다.”
“그래서 남겨?”
“그래서 내가 혼자 못 버렸지. 하지만 네가 돌아왔다고 대신 떠안을 물건도 아니다.”
보리는 일요일 저녁 표가 든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봤다. “나도 평생 남겠다고 한 적 없어.”
“서울에서 안 풀린 일 숨기려고 여기 눌러앉지는 마라. 이 집 빚이 네 실패를 덮어 주지도 못하고, 네가 남는다고 빚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도 않아.”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틀리지 않았다. 보리는 오븐의 녹슨 손잡이를 놓았다.
“숨으러 온 거 아니야. 적어도 이걸 버릴지 고칠지는 우리 이름으로 정하려고. 일요일 전까지 견적하고 꽃 조사까지만 볼게.”
“표를 또 미루지는 말고?”
“그건 일요일에 내가 정해.”
어머니가 짧게 웃었다. “그 대답은 네 답답한 아버지 닮았네. 견적은 내 전화로도 보내라.”
통화가 끝나자 보리는 오븐을 ‘기존 채무’ 칸에 밀어 넣지 않았다. 별도 메모에 ‘가족 결정 대기’라고 적고 오븐 사진과 두 견적서를 묶었다. 남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오후가 되자 해진은 과수원 꽃눈 추가 표본 요청을 가져왔다. 다섯 농가가 같은 간격으로 조사받기를 원했다. 마을회관에 칼과 봉투를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미정은 작업장 점검표를 접었다. “냉동 원물 시험은 꽃 조사 뒤로 미룹시다. 봄 냉해는 시간이 지나면 꽃 상태가 달라지고, 냉동고 안 여섯 상자는 내일까지 그대로 있으니까.”
보리는 벽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오래된 칼을 내렸다. 식품 작업에 바로 쓰지 않고, 칼집에 넣어 가방에 담았다. 꽃눈 절단용 새 칼은 마을회관에서 따로 소독해 쓸 생각이었다.
“일요일 표는?” 해진이 물었다.
“아직 있어.”
“다섯 농가 조사하면 주말 다 가.”
“알아.”
“또 바꿀 거야?”
보리는 폐업딱지로 만든 종이모자를 미정에게 다시 씌웠다. “그건 일요일에 결정할래. 오늘은 검은 꽃술 세는 법부터 배우고.”
셔터를 내리기 전 네 사람은 전원이 꺼져 있는지 확인했다. 전날 해동 표본도, 여섯 상자의 냉동 원물도 작업장 안에 없었다. 녹슨 오븐은 그대로였지만 쓸 것과 버릴 것, 지금 할 일과 나중 할 일이 갈라져 있었다.
밖의 과수원에서는 봄꽃이 햇빛 아래 흔들렸다. 익은 복숭아 향 대신 젖은 흙과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났다. 보리는 표본봉투 꾸러미를 들고 마을회관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보기 좋은 꽃을 고르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