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 아래 19번 벨트
정비창고의 빈 용지칸
정비창고의 빈 용지와 출입 기록 시간차를 확인한 고태식과 하지후가 복제 카드 가능성과 기록 원본을 보존한다.
정비창고 문에는 하지후가 붙인 붉은 봉인띠가 가로놓여 있었다. 고태식은 십칠 년 동안 그 문을 수천 번 열었다. 부품이 급하면 어깨로 밀고 들어갔고, 양손에 모터를 들었을 때는 무릎으로 손잡이를 눌렀다. 그런데 자기 카드가 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 뒤로는 손잡이 하나가 취조실 문보다 무거워 보였다.
“입회자 확인하겠습니다.” 지후가 말했다.
보안실 직원, 창고담당 최문석, 이나경, 그리고 태식. 로사는 미화반 인수인계를 마치고 집에 갔다. 태식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 귀에 걸렸다.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가 필요하다는 뜻이면 안 된다는 말.
문석이 하품을 삼키며 서명판을 받았다.
“내가 재고까지 다 보여 줬잖아요. 시험용 용지 한 묶음쯤 차이 날 수 있지.”
“차이가 날 수 있으니까 확인하는 겁니다.” 나경이 말했다.
“손실 조사관이 왜 정비창고까지 들어옵니까?”
“가방의 겉태그가 발권기에서 출력되지 않았고, 아래 태그는 취소 번호였습니다. 같은 규격 용지가 여기서 쓰이는지 확인하려고요.”
문석은 태식을 흘겨봤다.
“고 기사, 당신이 시험 출력하고 안 적은 거 아니야?”
태식의 입에서 아니라고 튀어나오기 직전 지후가 봉인띠를 촬영했다. 일련번호가 기록과 일치한다는 확인이 끝나고서야 문이 열렸다.
창고 안은 늘 그렇듯 금속과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선반에는 센서, 롤러 축, 벨트용 고무판이 구역별로 쌓여 있었다. 태식은 곧장 태그 용지 보관함으로 가려다가 멈췄다. 자기 발이 만드는 흔적도 조사에 포함될 수 있었다.
“어디죠?” 지후가 물었다.
“오른쪽 벽, 위에서 셋째 칸. 손전등 시험지라고 적힌 상자요.”
문석이 먼저 걸어가려 했지만 보안실 직원이 동선을 표시한 뒤 한 사람씩 들여보냈다. 상자의 뚜껑은 닫혀 있었다. 겉면 재고표에는 전날 날짜와 ‘잔량 200’이라는 문석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뚜껑을 열자 안은 비어 있었다.
바닥에 얇은 먼지만 고르게 앉아 있었고, 가운데에는 직사각형으로 먼지가 끊긴 자국이 선명했다. 얼마 전까지 종이 묶음이 놓여 있던 폭이었다.
“이상하네.” 문석이 말했다. “분명 하나 남았는데.”
태식은 자를 달라고 했다. 지후가 직접 재지 말고 위치를 설명하라고 하자 손가락을 접었다.
“한 묶음 폭이 저 정도입니다. 이백 장짜리 포장 하나.”
나경은 먼지선 옆에 눈금을 놓고 촬영했다. 접착면 아래 태그의 종이와 같은 배치인지 확인하려면 상자 라벨과 납품 명세가 필요했다. 문석은 사무실 책상 밑에서 파일철을 꺼냈다. 지난주 납품분 배치번호 끝자리가 증거봉투 속 태그 뒷면 인쇄와 맞았다.
태식은 빈 칸을 바라봤다.
“누가 가져갔습니까?” 지후가 물었다.
문석이 목을 긁었다.
“야간에 시험한다고 한 묶음 줬어요.”
“누구한테요?”
“기억이… 반사조끼 입었고. 정비반이었죠.”
“이름은요?”
“다들 반사조끼 입는데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해요. 급하다길래.”
태식이 불출대장을 펼쳤다. 마지막 서명은 사흘 전 자신의 것이었다. 센서 교정용으로 스무 장을 가져간 기록이었다. 전날 밤의 한 묶음은 어느 칸에도 없었다.
“얼굴은 봤습니까?” 나경이 물었다.
“봤겠죠. 봤으니까 줬지.”
“지금 떠오르는 얼굴과 그때 실제로 본 얼굴을 구분해 주세요. 고 기사님 이름이 로그에 나왔다고 해서 기억을 그쪽에 맞추지 마시고요.”
문석은 불편한 표정으로 태식을 보았다. 태식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 같았어요?”
“당신이 아니었다고는 못 하겠네.”
“나였다고도 못 하겠고.”
“그건 말장난이지.”
“아닙니다.” 지후가 끼어들었다. “현재는 미서명 불출이 있었다는 진술만 남깁니다. 사람은 확인 전입니다.”
문석은 자기가 의심받는 줄 알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간마다 대장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프린터 멈추면 비행기가 기다려 줍니까? 아침에 몰아 쓰는 게 다 관행이었어요.”
태식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도 사흘 전 스무 장을 먼저 가져가고 교대가 끝나기 직전에 서명했다. 문석이 자리를 비운 때는 책상 서랍 안 예비 열쇠를 썼다. 다들 아는 위치였다.
“예비 열쇠부터 회수합시다.” 태식이 말했다.
“이제 와서 원칙적인 척하지 마.” 문석이 쏘아붙였다.
“원칙적인 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비워 놨는지 쓰자는 겁니다.”
“그거 다 쓰면 나만 잘리겠지.”
“나도 여기 적혀 있어요.”
태식은 출입기록 화면에 떠 있는 자기 이름을 가리켰다. 문석은 입을 다물었다. 나경은 재고차이를 이백 장으로 확정해 적지 않았다. 포장 하나가 사라졌지만 그 포장이 가득 차 있었는지, 일부가 쓰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장상 잔량 200, 실물 0, 정확한 차이 추가 확인’이라고 썼다.
“숫자를 왜 흐리게 씁니까?” 문석이 물었다.
“오히려 정확하게 쓰는 겁니다. 상자에 적힌 숫자와 실제 셈을 구분하는 거죠.”
태식은 나경의 메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사관님은 숫자도 한 걸음씩 뒤로 물리네요.”
“고 기사님은 결론을 자꾸 앞으로 당기고요. 가운데쯤 만나겠죠.”
창고 확인이 끝난 뒤 그들은 보안실로 이동했다. 태식의 공구함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봉인띠는 멀쩡했다. 지후는 태식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다. 태식은 열쇠를 넘기면서도 손끝이 근질거렸다. 자기가 정리한 공구의 위치를 남이 건드리는 것이 싫었다.
뚜껑이 열리자 스패너와 테스터기, 절연장갑이 차례로 보였다. 태그 용지는 없었다. 바닥 깔개 아래까지 확인했지만 종이 조각 하나 나오지 않았다.
태식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됐습니까?”
지후는 대답 대신 물품 목록에 확인 표시를 했다.
“공구함에 없다는 건 확인됐습니다. 창고문을 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시간에 나는 7번 모터를 분해하고 있었다니까요.”
“작업표 말고 위치를 뒷받침할 게 있습니까?”
태식은 머릿속으로 야간 현장을 되감았다. 7번 모터의 진동값을 단말에 입력했고, 베어링 온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단말 로그인만으로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후배에게 단말을 건넨 적도 많았다.
“모터 전류가 한 번 떨어졌습니다. 내가 커버를 열 때 차단했으니까.”
“그게 고 기사님이 했다는 건요?” 나경이 물었다.
태식은 짜증을 삼켰다. 질문은 옳았다.
“작업구역 카메라가 있습니다. 얼굴은 멀어서 안 보일 수 있지만, 내 안전모 뒤에는 노란 테이프가 붙어 있어요. 작년에 금 간 데 표시해 둔 겁니다.”
“금 간 안전모를 아직 씁니까?” 지후가 물었다.
“표면 긁힘입니다. 검사받았어요.”
“그건 나중에 안전팀하고 따로 이야기하죠.”
“사람 궁지에 몰아 놓고 안전모 잔소리까지 합니까?”
“살아 있어야 결백도 밝히니까요.”
카메라 원본을 불러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태식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한 모금 마시고 바로 내려놓았다. 종이컵에서 탄 냄새가 났다. 나경은 밤새 확인한 손실 접수 세 건을 펼쳐 놓고 태그 중량과 포장 크기를 비교했다.
“왜 보험 쪽에서 이 가방에 관심을 갖는 겁니까?” 태식이 물었다. “분실 신고는 흔하잖아요.”
“흔해서요.”
나경은 첫 번째 접수서의 중량 칸을 짚었다. 신고품은 반도체 검사장비 부품. 두 번째는 정밀 센서. 세 번째는 광학 모듈. 이름은 다르지만 신고 중량은 소수점 아래까지 같았다. 포장업체도 달랐는데 손실 통보 시각은 매번 야간 점검 뒤였다.
“보상받으려고 꾸민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실제로 물건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우연히 숫자가 겹쳤을 수도 있죠. 저는 어느 쪽이든 지급하기 전에 확인해야 합니다.”
“또 셋이네요.”
“선택지가 많을수록 범인이 싫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를 골라 주길 기다리거든요.”
태식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기계 고장도 처음부터 원인 하나를 찍는 순간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안실 직원이 카메라 영상을 가져왔다. 화면 한쪽에 7번 모터 작업구역이 작게 잡혀 있었다. 시각은 새벽 한 시 십 분. 노란 테이프가 붙은 안전모가 프레임 아래로 들어왔다. 작업자가 무릎을 꿇자 얼굴은 가려졌지만, 태식 특유의 낡은 초록색 공구가방이 옆에 놓였다.
“저게 나입니다.”
지후는 영상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시 십일 분, 작업자가 차단기를 확인했다. 십이 분, 모터 전류가 떨어졌다. 같은 시각 창고 출입기록에는 태식의 카드가 찍혔다.
한 사람이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었다.
태식의 가슴에서 단단히 조여 있던 것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지후는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화면 시각이 표준시와 같다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내가 두 명이 아니라는 확인도 필요합니까?”
“출입기록 시계와 카메라 시계가 다르면 겹친다는 말부터 달라집니다.”
태식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결백이 눈앞에 있는데 또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그때 보안실 직원이 봉인사진을 확대했다. 공구함을 봉인한 직후 촬영된 화면 오른쪽 아래 시각과 출입기록 서버의 시각이 맞지 않았다. 같은 순간에 찍힌 보안실 벽시계가 사진 시각보다 거의 두 분 빨랐다.
“카메라가 느린 겁니까, 서버가 빠른 겁니까?” 나경이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태식은 화면 속 숫자를 노려봤다. 두 분이면 그를 창고로 보낼 수도, 7번 모터 앞에 남길 수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알리바이처럼 보였던 영상이 갑자기 칼날 양쪽을 가진 물건이 됐다.
지후가 보안관제실에 표준시 동기화 이력과 시계 보정표를 요청했다. 담당자는 관리상 오차일 뿐이라며 사건과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무관한지 확인하려고 받는 겁니다.” 지후가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태식은 자기 출입증을 목에서 벗겼다. 플라스틱 카드에는 닳은 얼굴 사진과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후 앞에 내려놓았다.
“새 번호가 나오기 전까지 가져가세요.”
“자진 반납으로 기록하겠습니다.”
“난 그 문 안 열었습니다.”
“그 말도 진술로 남깁니다.”
태식은 더 말하지 않았다. 확신을 크게 말할수록 시계의 두 분이 더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나경이 종이컵을 들어 그의 커피를 치우며 말했다.
“고 기사님.”
“왜요.”
“결론이 뒤로 가는 게 싫다고 했죠?”
“지금은 아주 달아난 것 같네요.”
“아니요. 이제 어떤 시계를 따라가야 하는지 찾은 겁니다.”
보안실 벽 너머에서 정각 알림음이 울렸다. 태식은 손목시계와 화면 속 시각을 번갈아 봤다. 세 개의 초침이 서로 다른 자리를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