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여섯 말의 편자못
마른 개울의 편자와 짚신 자국, 창고 표식이 남은 삼베가 길상의 귀환 차단 증언과 이어진다. 은광 능선에 이른 일행은 병자 수송과 인력 부족 때문에 즉시 진입하지 않고 정찰하며, 밤에 들린 열여덟 그릇 소리를 사람 수와 구별해 남긴다.
마른 개울에는 마른 곳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범수가 먼저 디딘 자갈 아래에서 물이 배어 나왔다. 그는 뒤따르는 민연화에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연화가 발을 거두자 그 자리에 검은 진흙이 천천히 솟았다.
“어제 물이 여기까지 왔소.”
길상이 말했다.
“오늘은 빠질 줄 알았는데.”
“빠진 물이 다 간 물은 아니지.”
범수가 긴 가지를 비탈 쪽에 댔다. 지면이 받치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강복단이 광주리 끈을 짧게 조였다. 돌 틈에 걸리면 물건보다 사람이 먼저 당겨질 수 있었다. 연화도 품의 종이를 다시 싸서 바깥 소매가 아니라 안쪽에 넣었다.
길상은 앞장서다가 자주 뒤를 봤다. 석구가 없는 자리를 살피는 듯했으나 누구도 가족 소식이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복단의 전갈과 석구의 걸음은 다른 길 위에 있었다. 이곳에서 빨리 걷는다고 그쪽의 밤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돌이 작아지고 개울 바닥이 넓어지는 자리에서 범수가 멈췄다. 진흙에 편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물이 훑은 가운데보다 가장자리의 깊은 자국이 또렷했다. 그는 발을 놓을 때마다 뒤의 사람에게 같은 자리를 밟으라고 했다.
연화가 마방 그림표를 꺼냈다. 길을 떠나기 전에 그려 둔 편자못의 자리가 있었다. 범수는 똑같다고 말하지 않고 한 자국 옆에 돌을 놓았다. 다른 자국에서도 같은 배열이 나왔다. 넓은 편자와 낡은 짚신 자국이 개울 양쪽으로 나뉘어 이어졌다.
“말 여섯이군.”
복단이 말했다.
범수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말이 여러 번 밟았을 수도 있소. 이 자국만 세어서 여섯이라고 할 수는 없지.”
“삯패 여섯, 칼 여섯, 여기 편자. 그것을 다 따로 세야 하나?”
“따로 세어야 같은 여섯인지도 알지.”
복단은 입을 삐죽했지만 자국을 밟지 않도록 발을 옮겼다. 연화는 다리에서 들은 여섯과 지금 비교한 못 배열을 다른 자리에 그렸다. 길상이 그림을 들여다보다 낮게 말했다.
“그 말들이 맞소. 앞의 둘은 내 수레를 막았고, 뒤의 넷은 사람들을 가운데로 몰았소.”
그는 자기 기억을 그림에 얹었다. 범수는 그제야 말들이 어디서 돌아섰는지 물었다. 길상이 가리킨 안쪽으로 낡은 짚신 흔적이 물가 가까이 몰려 있었다. 바닥 가운데를 두고 사람들이 굳이 가장자리로 다닐 까닭이 있었다.
***
눈가리개를 씌웠다는 자리는 생각보다 좁았다. 양쪽 비탈이 사람 키보다 높아지며 햇빛이 가늘게 잘렸다. 길상은 바위 하나를 가리키고 더 앞으로 가지 않았다.
“수레 세웠던 데요.”
복단이 바위 너머를 봤다. 길이 한 번 꺾였다. 거기서부터는 뒤를 돌아도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왜 여기서?”
“눈을 가리고 가야 은맥 자리를 함부로 퍼뜨리지 못한다고 했소.”
그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상인들도 투덜거리면서 따랐소. 제 돈 들어갈 자리라니까. 그런데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자…….”
길상은 말을 끊었다. 복단은 끝까지 들으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연화가 그녀 옆에 서서 길상에게 어느 사람을 직접 보았는지 물었다. 그가 이름을 자신하지 못하자 이름을 고르도록 몰아붙이지 않았다.
길상은 돌아서려던 사람의 어깨가 잡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것을 보고도 수레에 앉아 있었다. 채찍을 쥐고 있었으나 말에 쓰는 채찍이었고, 그걸로 여섯을 막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말끝에서 그는 자기가 겁이 났다고 했다. 이번에는 식구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범수가 바위 틈에서 삼베 조각을 발견했다. 한쪽 끝이 돌에 눌려 있었다. 연화는 옆의 흙부터 조금씩 걷었다. 잡아당기면 끊어질 정도로 얇아진 곳이 있었다. 복단이 그늘을 만들어 주자 먹 자국이 보였다. 심대업의 창고 물건에서 보던 표였다.
길상이 자기 손목을 보여 줬다. 천을 어느 폭으로 찢어 썼는지 손가락 두 개를 벌렸다. 범수는 조각을 그 손에 대지 않고 떨어뜨려 봤다. 너비는 비슷했지만 이 한 조각이 누구의 눈을 가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복단이 혀를 찼다.
“물건에는 주인 표가 있는데 사람에게는 눈가리개라.”
연화는 삼베를 마른 종이에 놓았다. 덕수의 반쪽 글과는 다른 데 넣었다. 은값을 보고 돌아가겠다는 말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은 길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게 됐다.
길상이 바위를 돌아서려 했다. 범수가 팔을 붙들었다. 그 앞의 비탈에서 작은 돌이 굴러내렸다. 길상은 그대로 굳었다. 돌이 멎은 뒤에도 범수의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바람 위로 나무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왔다.
범수는 일행을 바위의 그늘로 옮겼다. 위쪽 길에서 수레가 지나갔다. 보인 것은 바퀴 일부와 바퀴 아래 떨어지는 가루였다. 누가 몰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길상이 수레지기의 이름을 말하려 하자 범수가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을 이름으로 채울 때가 아니었다.
수레가 지나간 뒤에도 잠시 기다렸다. 복단은 광주리를 바닥에 놓고 숨을 골랐다. 그녀는 쫓아가자고 하지 않았다. 방금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간 길과 자기 발아래 길이 얼마나 가까운지 재고 있었다.
“저게 돌아오는 길이오?”
그녀가 길상에게 물었다.
“광석을 내리는 길입니다. 올라갈 때는 저기서 갈라지고.”
길상이 산기슭을 가리켰다.
그들은 수레 뒤를 밟는 대신 비탈 옆으로 돌아갔다. 범수가 먼저 발 디딜 곳을 보고, 연화와 복단이 지나고, 길상이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길상은 자기 뒤에서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도 두 번 돌아봤다.
***
능선 가까이 오자 밥 짓는 냄새가 났다. 복단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녀가 멈추자 연화도 코로 숨을 들이켰다. 가마니에 밴 묵은 곡식 냄새와 타는 나무 냄새였다. 허기가 그제야 배를 찔렀다. 아침에 나눠 먹은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나무 사이로 지붕이 보였다. 울타리 한쪽에 초소가 있었고, 수레가 드나드는 길은 돌아 나오는 길보다 넓었다. 길상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에 본 자리라고 했다. 얼굴은 누구도 구별할 수 없었다.
“저 안이오.”
그가 말했다.
복단은 나무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범수가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떼라고 하지 않고 한 뼘만 더 보자고 했다. 울타리 아래로 물이 흐르는 홈이 있었다. 사람이 몸을 낮추면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물길 따라 내려가면 되겠군.”
“내려가는 것까진 되겠지.”
범수가 답했다.
“돌아올 때는?”
“문턱 앞까지 와서 돌아가자고? 저 안에서는 또 열흘을 기다릴 텐데.”
복단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길상이 어깨를 움츠렸다. 연화는 밥 냄새가 나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저곳에 덕수가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다린다는 말이 죽음의 다른 이름이 되는 동안 장부를 정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종이를 접고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울타리까지의 거리를 발로 세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려갔다가 잡히면 아직 한양에 있는 식솔에게는 돌아갈 말조차 없어졌다.
복단이 연화를 봤다.
“산원도 가고 싶지?”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습니다.”
그 대답에 복단의 눈이 밝아졌다. 연화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데리고 오려면 수레가 있어야 합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받지요?”
“내가 업으면 되오.”
“둘이면요?”
복단이 말을 멈췄다. 그들은 아직 다친 사람 수를 몰랐다. 하나를 업고 다른 하나를 놓는 일을 이 자리에서 고를 수는 없었다. 범수는 초소와 물길 사이를 가리켰다. 가까운 길이지만 한번 들어서면 몸을 숨길 곳이 적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오면 문밖에서 막힐 수 있었다.
“관아는 농장 창고라고 버틸 거요.”
복단이 말했다.
“지금 돌아가면 또 종이를 고쳐 오라 하겠지.”
연화는 광석수레가 들어가는 길을 보았다. 눈가리개를 씌운 자리, 돌아가지 못했다는 길상의 말, 농사에 쓰는 것과 다른 수레의 짐. 각각 들고 가면 한 가지씩 핑계를 댈 수 있었다. 함께 들고 가야 했다. 그래도 반드시 문이 열린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핑계에 답할 것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당장 열 수 있다는 약속 대신, 누가 무엇을 더 가져와야 하는지까지요.”
복단은 나무껍질을 손톱으로 긁었다. 손톱 밑에 검은 것이 끼었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광주리를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보따리 안의 음식을 셌다. 오늘 밤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나눠 줄 만큼은 없었다.
찾으러 온 것과 데리고 돌아갈 준비는 달랐다. 복단의 손이 멎었다.
“좋소. 보이는 것부터 다 보자고.”
그녀가 낮게 말했다.
“내일 또 몰라서 왔다는 말은 하지 않게.”
***
네 사람은 한자리에 머리를 모으지 않았다. 범수가 초소를 볼 때 복단은 뒤쪽 길을 살폈다. 길상은 자기가 아는 길과 모르는 길의 경계를 짚어 줬다. 연화는 해가 옮겨 갈 때마다 지붕과 길의 자리를 종이에 그렸다. 움직이지 않는 지붕을 두 번 세지 않도록 먼저 본 곳에 작은 돌을 놓았다.
수레 한 대가 울타리로 들어갔다. 조금 뒤 다른 쪽에서 바퀴 소리가 났으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연화가 두 번째 수레를 그리려 하자 범수가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같은 수레가 안에서 돌아 나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소리가 난 쪽에만 표시했다.
길상이 물길을 보다가 손을 들었다. 산 위에서 내려온 물과 아래로 빠져나가는 물의 빛이 달랐다. 연화는 그 색으로 은이 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길상도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고 했다.
“돌아갈 때 저 물은 먹지 말라고요.”
복단은 조금 전에 채우려던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가 길을 가리키는 것 말고도 쓸모 있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대신 자기 통의 남은 물을 내밀었다. 길상은 조금만 마시고 돌려줬다.
해가 기울자 초소의 사람 그림자가 길어졌다. 범수가 나무 뒤로 자리를 더 옮겼다. 낮에는 안전해 보이던 빈터가 저녁에는 그림자 때문에 사람 모양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이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소의 사람이 울타리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복단의 손이 광주리 끈을 움켜쥐었다.
그 사람은 수레 길을 조금 걷다가 돌아갔다. 이쪽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범수는 확인하겠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네 사람 모두 땅 가까이 몸을 낮췄다. 연화는 자기 숨이 종이를 흔드는 소리를 들었다.
어두워진 뒤에야 복단이 속삭였다.
“불은 안 되겠지.”
길상이 모아 둔 잔가지를 내려다봤다. 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바람을 덜 받는 곳에 가마니를 깔았다. 능선 너머로 돌아가기에는 발밑이 너무 어두웠고, 동트는 빛에서 확인할 곳도 남아 있었다. 음식은 차가운 채로 나눴다. 길상은 다른 사람들이 먹은 뒤 손을 뻗었다.
그때 울타리 안에서 쇠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나, 둘.
복단이 씹던 것을 멈췄다. 연화는 손가락을 접었다. 소리 사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것은 짧았고 어떤 것은 길게 울렸다. 멎은 줄 알았던 뒤에 다시 두 번이 이어졌다.
열여덟.
연화는 어두운 종이 위에 손톱으로 자리를 잡고 숫자를 적었다. 사람이 아니라 소리였다. 누가 두 번 그릇을 놓았는지, 빈 그릇이 섞였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낮에 보지 못한 삶이 울타리 뒤에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복단은 남은 음식을 다시 쌌다. 내일 가져가려고 남기는 것인지 저 소리를 듣고 더 삼킬 수 없어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길상이 잔가지를 하나씩 옆으로 밀었다. 불을 놓지 않을 자리가 생겼다.
연화는 종이를 무릎 위에 두고 동쪽이 밝아질 곳을 봤다. 이제 이 능선에서 가져갈 것은 은광이라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데리고 돌아올 길의 부족한 자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