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삭제하지 못한 작업번호
보리는 해진과 퇴사 당시 상자를 열지만 기대하던 완성 레시피는 찾지 못한다. 원본을 보존한 복제본에서 과제번호 세 개와 논란 제품보다 11개월 앞선 시제품 이름을 확보하고, 과거의 기여를 입증할 단서와 지금의 감정을 구분해 말한다.
퇴사 상자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윤보리는 주방 한쪽 사무공간의 책상 위에 상자를 올리고 테이프 끝을 찾았다. 칼을 대면 안에 든 수첩까지 잘릴 것 같아 손톱으로 조금씩 뜯었다. 조금 전 남의 질문 앞에 앉아 있던 용기가 종이상자 하나 앞에서 사라졌다.
“힘으로 뜯으면 바닥부터 열릴 텐데.”
강해진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상자를 받아 가지 않았다. 보리가 내민 테이프 끝만 잡았다. 둘이 반대쪽으로 당기자 묵은 접착면이 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맨 위에는 회사 이름이 찍힌 종이컵이 있었다. 보리는 그걸 왜 가져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컵 안에 클립 세 개와 휘어진 티스푼이 들어 있었다. 명함은 구석이 눌린 채 뭉쳐 있었다. 윤보리. 상품개발. 이름 아래 직함을 보자 입안이 마른 것 같았다.
해진이 종이컵을 세워 두었다. “이건 버려?”
“아니. 아직.”
“알았어.”
그는 다시 묻지 않았다. 보리는 그것이 고마워서 오히려 투덜거렸다. 쓰레기인지 물으면 바로 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물건마다 마지막으로 썼던 날이 달라서, 한꺼번에 버리면 어느 날부터 없었던 일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상자 바닥에서 외장저장장치가 나왔다. 모서리에 흰 흠집이 두 줄 있었다. 케이블은 따로 감겨 있었고 오래된 수첩 사이에는 시제품 발송영수증이 몇 장 끼어 있었다. 보리는 컴퓨터 쪽으로 의자를 당겼다.
“일단 연결해 보자.”
해진이 케이블 끝을 보더니 자기 손을 거뒀다.
“나 디스크 복구하는 사람은 아니야.”
“고장 났는지 보려는 건데.”
“그래서 더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아. 바깥 상태부터 찍고, 장비 갖춘 데서 복제하자.”
보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또 기다리자고 할 줄 알았다. 즉시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누군가는 순서를 말했다. 그 순서 끝에서 자신만 지친 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열어 보지도 않고 또 맡기기만 하라고?”
말이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해진은 상자를 밀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냥 못 하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오늘 복제 가능한 곳을 같이 확인하자는 거야. 네가 옆에서 보고.”
보리는 컴퓨터 연결단자를 내려다봤다. 열고 싶은 것이 파일인지, 당장 무언가 해냈다는 기분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케이블을 놓자 손에 눌린 선이 남았다.
미정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포장 견본을 가지러 왔다가 두 사람 사이의 저장장치를 봤다.
“아직 안 꽂았지?”
“네. 여기 둘 다 저보다 저걸 더 걱정해요.”
“그건 떨어뜨려도 아프다고 말을 안 하잖아. 너는 말이라도 해.”
보리는 웃지 못하다가 입꼬리만 올렸다. 해진도 어색하게 웃었다. 미정은 빈 컵에 물을 따라 보리에게 건네고, 남은 포장 견본을 챙겼다. 장터 냉장 장비를 먼저 정리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보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수리점 영업부터 확인했다. 정산을 마냥 미룰 수는 없었다. 늦어지면 장치를 맡기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옥순에게도 남겼다.
두 사람은 표면과 연결부를 사진으로 남겼다. 케이스를 뜯지는 않았다. 아직 문을 연 가까운 수리점에 도착하자 기사는 먼저 장치 상태를 확인했다. 읽기 오류가 없어 복구 작업은 필요하지 않지만, 쓰기를 막고 복제하는 동안은 기다려야 했다. 보리는 예상 시간을 듣고 정산 전에 돌아갈 수 있겠는지 확인했다. 끝나지 않으면 먼저 가기로 했다. 해진은 자신이 아는 척 설명하지 않고 나란히 들었다.
“원본을 고쳐서 바로 보여 드리는 방식은 원하지 않습니다.” 보리가 말했다.
그 말은 해진이 대신하지 않았다. 기사에게 받을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해 달라는 말도, 회사 자료가 있을 수 있으니 불필요하게 파일을 열지 말아 달라는 요청도 보리가 했다. 그녀는 해진이 옆에 있다고 자기 일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해진은 물을 사 왔다. 보리가 병뚜껑을 따자 손이 조금 떨렸다. 그는 모르는 척 창밖을 보았다. 주차된 차의 젖은 유리에서 흐린 빛이 잘게 나뉘어 들어왔다. 보리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말했다.
“없으면 어떡하지?”
해진이 돌아봤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게 없으면. 그럼 또 나만 기억하는 거잖아.”
“그럼 없는 것까지 있다고 말하지는 말자.”
보리는 잠깐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좁히지 않았다.
“그다음에 어디를 찾아볼지 정하자고. 여기서 다 끝난다고는 말 안 했어.”
그녀는 손에 든 물병을 무릎에 놓았다. 괜찮을 거라는 말보다 속상했고, 그래서 믿을 만했다. 기대한 파일이 없더라도 둘이 여기 앉아 있었다는 일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동안 장터 장비를 거두는 작업도 끝나 갔다. 보리는 옥순의 연락에 곧 돌아가겠다고 답했다. 복제가 끝나자 원본 장치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작업장으로 돌아와 복제본을 열었을 때 보리가 제일 먼저 찾은 폴더는 비어 있었다. 완성 레시피를 떠올리게 하는 파일명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일정표와 개인 메모, 일부 발송 내역이었다.
보리는 검색창에 시제품 이름을 넣었다. 결과가 뜨지 않았다. 띄어쓰기를 바꾸고 다시 넣었다. 또 없었다. 해진은 옆에서 새 검색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녀가 세 번째 같은 말을 지웠을 때에야 종이 수첩을 탁자 위로 옮겼다.
“이건 네가 회사 서버 번호 적었다던 거지?”
보리는 화면을 닫지 않은 채 수첩을 펼쳤다. 펜이 번진 줄 옆에 작은 번호가 있었다. 메모에는 몇 차 시험인지, 누구에게 발송했는지, 언제 회신을 받기로 했는지가 적혀 있었다. 비슷한 제목을 기억하느라 놓쳤던 숫자였다.
복제본의 개인 작업일지에서 같은 번호가 나왔다.
그녀는 화면을 당겼다. 화려한 레시피 표도 완성 사진도 없었다. 개발과제 번호와 짧은 작업 메모였다. 그 아래 연결된 발송영수증 이미지에는 접수 날짜와 시제품명이 있었다. 보리는 종이 수첩을 옆에 놓고 두 날짜를 번갈아 읽었다.
“이거야.”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찍으려 했다. 사진 한 장이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할 터였다. 보내 놓고 나면 적어도 오늘 밤 누군가는 당황할 것 같았다.
해진이 화면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래처 담당자 이름과 개인 연락처가 그대로 있었다. 보리는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렸다. 어제 농가 번호를 QR에서 지웠던 손으로 오늘은 다른 사람의 번호를 퍼뜨릴 뻔했다.
“내가 또 그러네.”
“찾아서 흥분한 거지.”
“그렇다고 괜찮아지는 건 아니잖아.”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위로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보리는 사진을 찍지 않고 메모장을 열었다. 자료의 위치와 필요한 작업번호만 먼저 적었다. 공개할 수 있을지 검토할 부분, 외부로 내보내지 않을 부분을 갈랐다. 그 일을 끝낼 때까지 누구에게도 찾았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미정이 들어왔을 때 보리는 작업번호 세 개를 큰 글씨로 적고 있었다. 미정은 환하게 웃으려다가 보리 표정을 보고 기다렸다.
“다 찾았어?”
“찾아 달라고 할 것을 찾았어요.”
보리는 펜 끝으로 세 줄을 짚었다. 회사 서버에 있을 개발과제 기록을 요청할 정확한 번호였다. 개인 메모가 말하는 것과 회사 원본이 말하는 것을 맞춰 볼 수 있게 됐다. 완성 레시피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누가 어느 부분을 만들었는지까지 한 번에 결정할 자료도 아니었다.
미정은 잠깐 생각하더니 의자를 끌어왔다. “그럼 빈손은 아니네.”
“네. 빈손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자 보리의 목이 다시 잠겼다. 세 줄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래 상자를 피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미정은 음식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오늘 시험분의 단맛이 전보다 덜 튀었다며, 보리가 돌아오면 둘이 다시 맛보려고 남겨 두었다고 했다.
보리는 벌떡 일어났다. 자료를 찾는 동안 놓친 현재의 맛이 있었다. 세 사람은 손을 씻고 주방으로 갔다. 미정이 소량을 깨끗한 접시에 나눴다. 보리는 바로 평을 말하지 않고 한 번 삼킨 뒤 남은 향을 기다렸다.
“끝에 좀 거칠어요.”
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어. 내일 바꿀까?”
“오늘은 원인부터 적어 놓고, 다음 시험에서 한 가지만 바꿔요.”
해진은 자기 접시를 보며 물었다. “이건 제 생각도 받습니까?”
“맛있다는 말만 할 거면 안 받아요.”
“두 번째 숟갈은 더 먹고 싶은데, 빵 없이 계속 먹으면 달아요.”
보리가 웃었다. 그가 새로 얻은 직업이라도 된 듯 진지해서였다. 미정은 시식 의견을 받아 적었다. 보리는 그 옆에 자기 이름과 날짜를 썼다. 지금 만드는 기록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과 나란히 쌓였다. 언젠가 기억만 믿고 싸우지 않아도 되게.
작업을 마치고 책상으로 돌아왔을 때 해진은 원본 장치를 가방 안쪽에 넣고 있었다. 보리는 그가 케이블이 눌리지 않도록 한 번 더 고르는 것을 봤다.
“저 장치를 저보다 조심히 드네요. 저는 버스에서 두 번 굴렀는데.”
해진이 손을 멈췄다. “저장장치는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이 괜찮다고 하면 믿어요?”
“이제는 한 번 더 물어보려고.”
그가 그녀를 봤다. 보리는 농담으로 덮을 말을 찾다가 그만뒀다. 어제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질문에 대답했다. 그중에 자기 마음을 묻는 질문은 드물었다.
“오늘은 속상했어. 레시피 없어서.”
해진은 잠자코 들었다.
“그런데 세 개 찾은 건 좋아. 둘 다야.”
“그럼 둘 다로 알아둘게.”
보리는 가방을 건네받고 어깨에 멨다. 기다려 달라고 말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해진도 짐을 들고 문을 열었다. 보리는 불을 끄려다가 탁자 위 영수증 사본을 다시 봤다.
첫 번째 과제번호 옆 시제품명이 눈에 걸렸다. 처음 보는 이름이 아니었다. 논란이 된 제품이 나오기 전에 자신이 붙였던 시험 이름이었다. 발송 날짜를 다시 계산하니 열한 달이 앞섰다.
보리는 해진을 불렀다. 그는 문을 닫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사진을 찍어 공개하지 않았다. 그녀는 날짜와 시제품명을 차례로 가리켰다.
“열한 달 먼저 보냈어. 이 이름으로.”
해진이 두 줄을 읽었다. “그때 서버에 뭐가 있었는지 물을 수 있겠네.”
“응. 그걸 물을 거야.”
보리는 사본을 과제번호 세 개와 함께 넣었다. 상자는 다시 닫았지만 버리지 않았다. 이제 장터 판매 정산을 해야 했고, 예약한 사람들의 병을 언제 만들지도 정해야 했다. 이 기록을 찾았다고 그 약속들이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은 일 맨 위에 정산을, 그 아래에 원본 요청 준비를 썼다. 두 줄은 서로 지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기 이름을 적은 뒤 펜 뚜껑을 닫았다. 사무공간의 불을 끄고 나오자 바깥에서 젖은 천막을 터는 소리가 났다. 보리는 옥순이 들어올 주방 쪽으로 빈 판매 상자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