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영하 이 점 팔 도
윤보리와 강해진이 공식 영하 0.9도와 저지대 영하 2.8도의 차이를 온도·꽃눈 표본으로 기록해 피해 근거를 세운다.
오후 한 시, 윤보리는 강해진의 봉고차 조수석에서 귀경버스 표를 세 번째로 확인했다.
출발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취소 버튼은 여전히 파랬다. 눌러야 할 이유도, 누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오전보다 많아졌다.
무릎 위에는 꽃눈 예비조사표가 놓여 있었다. 저지대 A구역 갈변률 63퍼센트. 능선 가까운 C구역은 표본 수가 적어 아직 계산하지 못했다. 가족 작업장에서 본 전기료 체납 고지는 사진으로만 휴대전화에 들어 있었고, 전년도에 손질해 외부 냉동보관처에 맡긴 가공용 원물 여섯 상자는 전혀 다른 번호로 메모돼 있었다.
보리는 두 줄 사이에 굵은 선을 그었다.
“뭘 나눠?” 운전하던 해진이 물었다.
“올해 꽃이랑 작년 냉동 원물. 옥순 아줌마가 아까 ‘저장 복숭아도 있다’고 한 줄로 말하니까, 듣는 사람은 지금 밭에 복숭아가 열린 줄 알겠더라.”
“지금은 꽃이지.”
“그러니까. 얼어 있는 건 나무가 아니라 냉동창고 안 작년 물량이고.”
해진이 방향지시등을 켰다. “그 선은 굵게 그어 둬. 나중에 보험 조사랑 가공재개 얘기가 섞이면 더 복잡해져.”
봉고차는 마을 위쪽 기상관측소로 올라갔다. 작은 울타리 안에 흰 백엽상과 강수량계, 바람개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백엽상 주변 잔디에는 오전 서리가 거의 녹았지만 그늘진 구석만 희었다.
최옥순은 사무실 프린터 앞에서 종이를 붙잡고 있었다. “나왔다. 공식 최저 영하 영 점 구.”
출력지의 붉은 선은 새벽 네 시 사십 분에 가장 낮았다가 곧 올라갔다. 해진은 자를 대고 시각을 확인했다. 보리는 과수원 말뚝센서 사진을 열었다. 같은 시각, 골짜기 아래 값은 영하 2.8도였다. 영하 2도 아래에 머문 시간은 47분.
“센서가 틀렸다고 하면?” 옥순이 물었다.
“그 말을 못 하게 하는 게 아니라, 틀렸는지 확인할 자료를 같이 내야죠.” 해진은 보관함에서 교정성적서를 꺼냈다. “지난달 교정, 설치 높이 지면에서 1.2미터, 시계 오차는 12초. 배터리 교체 기록도 있습니다.”
보리는 백엽상 온도계와 서류를 번갈아 봤다. “공식값이 맞고 우리 것도 맞을 수 있어?”
“관측한 장소가 다르니까. 찬 공기는 물처럼 낮은 데 고여. 바람이 약한 밤에는 능선 건너 관측소보다 골짜기 밭이 몇 도 더 내려갈 수 있어.”
“냉기호수.”
“용어도 아네?”
“아까 차에서 검색했어. 도시에서 회의할 때도 모르는 말 나오면 화장실에서 찾아봤거든.”
옥순이 웃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화장실을 오래 갔구나.”
보리는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서울 회사 화장실 칸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하던 날이 떠올랐다. 표절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댓글은 온도처럼 숫자로 비교할 수 없었다. 누가 더 악의적인지,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매번 달라졌다.
해진이 현장조사표 세 장을 펼쳤다. “저지대, 중간, 능선. 각 세 지점씩 같은 순서로 갑니다. 온도만 재는 게 아니라 꽃눈도 같은 간격으로 보고요.”
옥순이 망설였다. “능선 꽃은 멀쩡해. 그걸 같이 내면 피해율이 낮아지는 것 아니냐?”
“필지 전체 판정은 조사자가 합니다. 우리가 피해 큰 곳만 고르면 저지대 기록도 유리한 센서만 골랐다고 보일 수 있어요.”
“그래도 농가들한테 뭐라고 해. 멀쩡한 꽃 사진까지 찍어서 보상을 깎았다고 할 텐데.”
보리는 오전에 갈랐던 꽃눈을 생각했다. 겉이 온전한 꽃 속이 검었고, 얼음에 싸였던 꽃 중에도 흰 중심이 남아 있었다. 보기 좋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 같지 않았다.
“세 곳 다 찍어요.” 보리가 말했다. “대신 한 표에 섞지 말고 높이와 지점을 앞에 크게 쓰죠. 피해가 덜한 곳이 있다는 게 아래밭이 안 얼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옥순이 보리를 바라봤다. “너 여섯 시 차라며.”
“그 전에 끝내면 되죠.”
“이 산을 너무 작게 기억하고 왔구나.” 해진이 말했다.
세 사람은 다시 과수원으로 내려갔다. 저지대 말뚝센서는 골짜기 바닥에서 무릎 두 개 높이쯤 솟아 있었다. 화면에 남은 성에를 옥순이 휴지로 문지르려 하자 해진이 막았다.
“표면 닦기 전에 사진부터요. 센서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남겨야 합니다.”
보리가 표찰과 화면, 주변 지형을 한 프레임에 담았다. 휴지로 성에를 걷자 저장된 최저값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영하 2.8도.
“영하 영 점 구와 이 점 팔 사이에 밭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네.” 보리가 말했다.
“밭도 한 덩어리는 아니야.” 해진은 위쪽을 가리켰다. “중간 지점부터 바람길이 열려.”
그들은 열 걸음마다 멈췄다. 해진이 센서 높이와 GPS 시각을 읽고, 보리는 나무 번호와 가지 방향을 적었다. 꽃은 오전처럼 아직 열매가 아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 꽃잎이 떨렸고, 검은 꽃술은 절단해 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중간 지점에서는 낙엽과 비닐 조각이 배수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해진이 장갑을 끼고 쪼그려 앉았다.
“이걸 지금 치우면 어젯밤 상태가 달라져.”
옥순이 물었다. “그럼 그냥 둬?”
“사진과 위치 먼저. 조사에 필요한 상태를 남긴 뒤 물길은 열어야죠. 비 오면 뿌리 쪽이 더 상합니다.”
보리는 막힌 배수로를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해진은 찬 공기의 흐름을 막았을 가능성만 적고 원인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낙엽을 걷어 내자 축축한 흙 냄새가 올라왔다.
“사진 찍고 치우는 것도 일 순서가 있네.” 보리가 말했다.
“네 디저트도 굽기 전이랑 후가 다르잖아.”
“나는 굽다가 망하면 사진 안 찍었어.”
“어제 사진은 남아 있던데.”
보리는 실패한 타르트 사진 속 해진의 웃음을 떠올리고 흙 한 줌을 그의 장화 쪽으로 찼다. 해진은 피하지 못했다.
“관측 기사님, 국지성 흙비입니다.”
“원인 제공자까지 현장에서 확인됐네요.”
옥순이 두 사람 사이에 표본봉투를 내밀었다. “연애성 재해는 나중에 하고 C구역 간다.”
능선은 바람이 셌다. 꽃잎의 얼음은 모두 녹았고 햇볕을 받은 가지는 따뜻했다. 열 번째 꽃눈을 갈랐을 때 중심은 희었다. 다음 것도, 그다음 것도 살아 있었다.
옥순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여긴 멀쩡하네.”
“좋은 일이잖아요.” 보리가 말했다.
“좋지. 좋은데, 아래밭 생각하면 웃기가 그렇다.”
해진이 표에 생존이라고 적었다. “여기가 살아 있어야 온도구배가 설명됩니다. 같은 밤, 같은 품종인데 높이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는 대조가 되니까요.”
보리는 첫 표를 자청해 들었다. 숫자는 차가웠다. 하지만 누가 더 가엾은지 겨루게 하지는 않았다. 영하 2.8도는 아래밭을 불쌍하게 만들지 않았고, 흰 꽃술은 능선 농가를 배신자로 만들지 않았다. 서로 다른 자리를 같은 말로 우기지 않게 했을 뿐이었다.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아홉 지점 기록이 끝났다. 해진은 관측소로 돌아가 자료를 한 장의 도면에 겹쳤다. 저지대 세 지점은 모두 영하 2도 아래, 중간은 영하 1도대, 능선은 공식값과 비슷했다. 꽃눈 갈변도 같은 방향으로 낮아졌다.
옥순이 말했다. “이걸 재조사 요청서에 붙이면 되겠구나.”
“예비자료로요.” 해진이 답했다. “피해율과 보상 범위는 현장 확인 뒤 따로 정해집니다. 오늘 숫자로 받을 돈을 미리 계산하면 안 돼요.”
“그 말은 꼭 찬물처럼 한다.”
“찬물 온도도 재야 하니까.”
보리는 프린터에서 나온 첫 표를 집었다. 오른쪽 위에 작성자 칸이 비어 있었다. “여기 세 사람 이름 다 쓰죠. 해진 혼자 측정한 걸로 하지 말고.”
해진이 펜을 건넸다. 옥순, 해진, 보리 순으로 서명했다.
휴대전화가 다섯 시 십 분을 알렸다. 정류장까지 봉고차로 삼십 분, 짐을 싣고 가면 빠듯했다. 보리는 가방이 있는 가족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셔터 안은 여전히 전기가 끊겨 어두웠다. 전년도 냉동 원물 소량 표본은 해진이 오전에 외부 냉동보관처로 되가져가 작업장에는 없었다. 오븐도 냉장고도 전원을 넣을 수 없었다. 보리는 여행가방 손잡이를 세우고, 벽에 걸린 계량스푼을 바라봤다.
“태워다줄게.” 해진이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돼.”
“내일 재조사 요청서는 누가 써?”
“옥순 아주머니랑 내가.”
“냉동보관처 여섯 상자 상태는?”
“류미정 제빵사한테 연락했어. 내일 오전에 기록부터 같이 보기로 했고.”
“나 없이도 다 되네.”
“네가 가도 해야 할 일은 하고, 남아도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어.”
그 말은 붙잡는 말보다 더 오래 남았다. 보리는 휴대전화에서 버스표를 열었다. 취소 수수료는 출발 한 시간 전을 지나 올라가 있었다. 18시 20분 표는 아직 유효했다.
“정류장 가자.”
해진은 알겠다고만 했다.
버스터미널에는 여섯 시 십 분에 도착했다. 서울행 버스가 승강장에 들어와 있었고 기사가 짐칸 문을 열었다. 보리는 여행가방을 들고 줄 끝에 섰다. 앞사람이 표를 찍을 때마다 전자음이 났다.
그녀 차례가 두 사람 남았을 때 옥순에게 사진이 왔다. 오후에 만든 대조표 아래, 마을 다섯 농가 이름이 추가돼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 밭도 봐 달라’는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
보리는 표를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매표창구로 뛰어가 표를 일요일 저녁으로 변경했다. 직원이 왜 환불하지 않고 바꾸느냐고 묻자 대답이 금방 나왔다.
“돌아갈 날을 없애지는 않으려고요.”
18시 20분 버스는 정시에 떠났다. 보리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표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승강장 유리 너머 붉은 후미등이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내일 냉동 원물은 맛보는 거 아니지?” 돌아온 해진에게 보리가 물었다.
“상태와 온도기록부터. 작업장 전기도 없고, 미정 씨가 사용 가능 판정을 하기 전엔 포장도 함부로 안 열어.”
“좋아. 올해 꽃하고도 섞지 말고.”
해진은 보리의 여행가방을 뺏지 않고 바퀴 앞 얼음 조각만 발로 밀어냈다. “알겠습니다, 작성자 윤보리 씨.”
보리는 직접 가방을 끌었다. 일요일 표는 휴대전화 안에 남았고, 내일 오전 약속은 종이 대조표 위에 새로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