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5의 유언
사고가 없었던 아침
라그랑주 5 정거장의 이상 기압을 감지한 진아리가 기록되지 않은 사고의 흔적을 추적한다.
종이띠가 먼저 움직였다.
진아리는 공구함을 내려놓던 손을 멈췄다. 환기 그릴에 붙여 둔 얇은 띠가 복도 쪽으로 들리고 있었다. 곧장, 팽팽하게. 평소라면 끝이 조금 흔들리는 정도였다.
“지금 송풍 바꿨어?”
등 뒤에서 대답 대신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리는 돌아보려 했다. 그 순간 양쪽 귀가 꽉 막혔다. 귀 안에서 무엇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공구함 손잡이를 놓쳤고, 발밑의 회색 바닥이 얼굴 쪽으로 기울었다.
무릎이 먼저 닿았다. 다음은 어깨였다.
흩어진 소켓들이 복도 가장자리로 굴러갔다. 저편에서 누군가 욕을 했다. 입 모양은 보였으나 소리가 멀었다.
벽의 중앙 패널은 초록색이었다.
100.8 kPa.
아리는 엎드린 채 허리의 휴대 압력계를 당겼다. 화면이 안전고리 안에서 흔들렸다. 숫자가 내려가고 있었다. 잘못 본 줄 알고 엄지로 표면을 문질렀다.
다시 보아도 내려가고 있었다.
“가온. C-12 압력.”
스피커의 대답은 물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아리는 알아듣는 대신 단말 자막을 읽었다.
〈중앙 센서 기준, 정상 범위입니다.〉
정상이라는 글자 옆에서 계측기의 저압 표시가 깜박였다.
맞은편 작업자가 쓰러진 동료에게 다가가려다 바닥에 손을 짚었다. 아리는 손바닥을 펴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비틀거리며 설비실 문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문 너머 압력을 확인하지 않고 경계를 여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벽의 비상 통신을 눌렀다.
“중앙 제어, C-12. 현장 저압입니다. 휴대계 하강 중. 부상자 있어요. 구역 격리 확인해 주세요.”
〈중앙 표시 정상. 현장 수치 재확인 바랍니다.〉
“그러니까 현장을 보라고요.”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너무 컸는지 알 수 없었다. 아리는 계측기 화면을 통신 카메라 앞으로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사람이 대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경계문 그대로 두세요. 대기설비팀 들어갑니다.〉
초록색 패널 아래로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리는 코피인 줄 알고 코를 훔쳤다. 손등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귀 밑을 만졌을 때에야 장갑 끝에 피가 번졌다.
그 뒤의 일은 띄엄띄엄 남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숫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 건너편 작업자가 동료의 이름을 계속 부른 것. 안내등이 바뀌고, 응급팀의 신발이 흩어진 소켓을 밀어낸 것.
압력계의 경고등이 꺼졌을 때 아리는 안도보다 화가 났다.
복도 끝 패널은 끝까지 정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내 말 들려?”
리오 박의 입이 가까이에서 움직였다.
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귀에서 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들린다고 하면 바로 일어나게 해 줄 것 같았지만, 리오는 의무팀이 가져온 의자에서 그녀를 밀어 세우지 않았다.
“세 사람은?”
“옮기고 있어. 너도 가야 해.”
“격막 쪽 확인은?”
“네 대신 볼 사람이 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아리는 매일 누군가 대신할 수 있게 점검표를 썼으면서, 막상 자기 없이 설비실 안이 돌아간다는 말을 듣자 손에서 공구를 빼앗긴 것 같았다.
들것 하나가 지나갔다. 아까 동료 이름을 부르던 작업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아리와 눈이 마주치자 괜찮다는 듯 손을 들려 했다. 손목이 중간에서 멈췄다. 따라가던 의무요원이 담요를 다시 덮어 주었다.
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몸을 도로 앉혔다.
“알았어. 갈게.”
다만 설비팀이 통신으로 물어 온 배관 표식에는 대답했다. 지난 교대에서 자신이 기록한 위치였다. 그녀는 화면에 표시된 두 분기 가운데 하나를 짚어 주고, 실제 밸브 표식을 다시 읽어 달라고 했다. 상대가 읽은 글자가 맞자 그제야 손을 내렸다.
통신 너머에서 차단 확인이 이어졌다. 손상된 격막 구간을 격리하고 임시 봉쇄를 점검한다는 보고였다. 옆에 선 제어 담당자가 제한된 우회 공급 상태를 확인했다.
아리는 처음으로 공구함을 찾지 않았다.
의무요원이 그녀의 장갑을 벗기다 멈췄다.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잠깐만요. 사진 한 장만.”
“치료 늦추지는 않습니다.”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손으로 단말을 들었다. 피 묻은 장갑과 계측기가 같은 화면에 들어왔다. 초점은 조금 흔들렸다.
그 사진 한 장으로 공기가 빠졌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아무 흔적도 없이 이 복도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
의무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역한 금속 맛이 났다.
아리는 입안을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의료진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 진찰을 받는 동안 계측기는 의자 옆 선반에 놓였다. 화면에는 최저값이 남아 있었다.
72.4.
처음에는 그 숫자만 보았다. 조금 뒤에는 화면 가장자리의 흰 흠집이 보였다. 넘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친 자국 같았다.
혹시 그때 망가졌다면.
그 생각이 한 번 들어오자 숫자가 달라 보였다.
“진아리 씨.”
등록 담당자가 침상 끝으로 왔다.
“사고번호 확인이 안 돼서요. 우선 임시 접수로 남기겠습니다.”
“C-12 감압이에요.”
“구역과 시각은 적었습니다. 중앙 목록에 연결되는 번호가 없어요.”
아리는 벽 단말을 보았다. 옆 침상으로 옮겨 간 작업자의 팔찌에도 같은 구역 문자가 떠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시간에 다쳤는데, 목록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리오가 담당자에게 다가왔다.
“그 때문에 치료가 멈춥니까?”
“지금 하는 처치는 계속합니다. 비용 구분과 재난보장 연계가 미정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번호를 임의로 만들 권한은 없습니다.”
리오의 턱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렸다.
“그 말도 기록해 주세요. 연계 미정. 사고가 없었다고 쓰지 말고요.”
담당자는 화면을 돌려 보였다. 빈 사고번호 칸 아래에 현장 진술에 따른 임시 접수라는 문구가 있었다. 리오는 읽고 나서 길을 비켰다.
아리는 가온을 불렀다.
“내 휴대계 기록을 사고 입력에 붙여.”
〈해당 장치는 현장 점검용입니다. 운영 판정 입력으로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기록도 못 붙여?”
〈민원 첨부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공식 사고 판정과는 구분됩니다.〉
민원.
아리는 그 두 글자를 한참 보았다. 복도에 쓰러져 있던 사람 셋과 자신의 피 묻은 장갑이 그 작은 칸 안으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리오가 선반에서 계측기를 집으려 하자 아리가 먼저 손을 뻗었다.
“잠깐.”
“빼앗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아리는 손을 멈췄다. 리오가 내민 것은 충전선이었다. 계측기의 배터리 표시가 마지막 한 칸을 깜박이고 있었다.
“꺼지면 불안할 것 같아서.”
“고마워.”
아리는 충전선을 꽂기 전에 기록 화면을 열었다. 이 기종은 점검 기록을 순환 저장했다. 그대로 측정을 이어 두면 언젠가는 오래된 구간부터 덮였다.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충분한’이라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해당 구간을 보존 잠금으로 지정했다. 장치가 확인 문구를 띄웠고, 리오에게 그것을 함께 읽어 달라고 했다. 사고 전후 시각과 장치 번호가 맞는지 두 번 확인한 다음에야 충전했다.
덮개는 열지 않았다. 기록을 고치거나 새 이름으로 저장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나중에 자신이 숫자를 바꿨다고 할까 봐서이기도 했지만, 더 무서운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정말 잘못 읽었다면, 그것도 이 안에 남아 있어야 했다.
***
권도한은 아리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관리동에서 재단의 위험모형을 살피던 감사관이라고 리오가 소개했다. 단정한 옷차림에 비해 신발에는 이동 구역의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침상 가까이 의자를 가져오다가 먼저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됩니까?”
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측기를 보자고 오신 거죠.”
“진아리 씨가 원본 대조를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조하면 사고번호가 생겨요?”
“지금은 약속할 수 없습니다.”
아리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따라 고개를 들이밀지 않고, 선반 옆에서 기다렸다. 그 침묵 때문에 오히려 아리가 먼저 계측기를 건넸다.
도한은 전원을 누르지 않았다. 화면에 이미 표시된 잠금 상태와 장치 번호를 읽고, 가져온 보관 봉투의 번호를 리오에게도 확인시켰다. 제대로 복제할 장비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더 조작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최저값 말고.”
아리는 자신의 단말에 남겨 둔 기록 화면 사진을 열었다.
“이 기계는 짧은 간격으로 찍어요. 중앙 패널처럼 한 번 보고 끝내는 게 아니라요. 떨어졌다 돌아오는 동안 계속.”
도한이 숫자 아래의 시각을 확대했다.
“영점이초 간격이군요.”
“저압 구간이 사십사 초예요. 여기 규정은 팔십오 아래 십 초면 사고로 남겨야 하고요. 점검할 때마다 외우게 하는데, 막상 제 차례에는 아무것도 없대요.”
리오가 가온에게 해당 규정의 원문을 띄워 달라고 했다. 도한은 아리의 설명과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바로 동의하는 대신 자기 단말에 항목을 하나 적었다.
아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렇게 조심하세요?”
“무엇을요?”
“제가 다친 건 보이잖아요.”
도한은 의무실 쪽을 잠깐 보았다.
“다친 사실을 확인하는 일과, 어떤 장치가 무엇을 기록했는지 확인하는 일은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계측기가 고장일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 가능성도 확인하겠습니다.”
아리는 이불 끝을 쥐었다. 자신도 방금 생각했던 일인데 남에게 들으니 화가 났다. 계측기에 난 흰 흠집이 자꾸 눈에 밟혔다.
리오가 끼어들려 하자 아리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제가 보는 앞에서 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도한은 가온에게 중앙 압력 기록의 조회를 요청했다. 권한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의무요원이 들어와 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도한은 질문을 멈추고 의자를 뒤로 뺐다. 검사가 끝날 때까지 화면도 그녀 쪽으로 들이대지 않았다.
잠시 후 중앙 그래프가 열렸다.
아리는 사고 시각 앞뒤를 보았다. 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공급이 조절되는 구역에서 그녀가 늘 보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운데 한 구간이 달랐다.
도한이 손가락 두 개로 그 부분을 늘렸다. 선이 길어졌다. 길어져도 굴곡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온. 이건 어떤 기록을 그린 화면입니까?”
〈중앙 압력 조회 결과입니다.〉
“원시값인지, 가공된 값인지 구분해서.”
추가 조회 표시가 떴다.
아리는 평평한 선의 시작과 끝을 읽었다. 자신의 사진에 적힌 시간과 맞춰 보았다.
사십사 초.
도한은 아직 조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리도 하지 않았다. 화면이 값을 묶어 보여 주는 방식 때문일 수 있었다. 잘못된 센서가 꼭 중앙 쪽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아리는 이제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알았다.
그녀가 바닥에 누워 피를 닦는 동안, 이 선은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이것도 남겨 주세요.”
아리가 말했다.
“제 계측기만 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쪽의 기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