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1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메스를 놓은 의사

수술실을 떠난 오세현이 야간왕진팀에서 떨리는 손과 첫 환자를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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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현은 닫힌 가방을 열지 못했다.

검은 가죽은 오래 말라 손잡이 끝이 희게 일어나 있었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때 산 가방이었다. 안에는 이제 쓰지 않는 수술모와 이름이 지워진 명찰, 끝이 무뎌진 펜라이트가 들어 있었다. 버리면 과거를 부정하는 것 같고, 열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 그는 가방을 발끝으로 책상 아래 밀어 넣었다.

“숨긴다고 손이 안 떨리는 건 아니죠.”

문하진이 맞은편에서 말했다. 지역보건소 창고를 개조한 야간왕진팀 사무실은 두 사람이 앉으면 꽉 찼다. 벽에는 당직표와 동네 약국의 야간 연락망이 붙어 있었고, 선반에는 신발 덮개와 일회용 장갑이 크기별로 놓여 있었다. 하진의 왕진가방은 이미 열려 있었다. 체온계, 청진기, 약 확인표, 작은 손전등. 물건들은 손을 뻗는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세현은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숨긴 게 아닙니다.”

“그럼 왜 왼발로 밀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웅웅거렸다. 수술실 천장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기억이 영상처럼 돌아온다고 말했지만 세현에게 과거는 소리로 왔다. 경보음 한 번, 누군가 수치를 복창하던 목소리, 장갑 안에서 땀이 차던 소리. 그리고 메스를 잡은 오른손이 자기 손이 아닌 것처럼 떨리기 시작한 순간.

하진이 종이 한 장을 책상 위로 밀었다. 당직표였다. 비어 있는 금요일 칸 옆에 작은 글씨로 ‘동행·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사를 구한다더니 서기를 구했습니까?”

“기록을 우습게 보는 의사는 안 구해요.”

“내 손 상태는 알고 연락한 겁니까?”

“알고 연락했어요.”

세현은 종이를 읽었다. 진료 책임, 연락 순서, 단독 처치 금지, 투약 확인. 한 줄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를 현장에 데려가 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는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진은 서랍에서 빈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가운데 선을 긋고 왼쪽에 ‘가능’, 오른쪽에 ‘불가’라고 썼다.

“직접 쓰세요.”

“면접을 이런 식으로 봅니까?”

“면접 아니에요. 저는 선생님을 뽑기로 했고, 선생님은 도망갈 이유를 찾는 중이니까.”

세현은 웃지 못했다. 하진은 대학병원에서 함께 일한 적이 없었다. 사고 뒤 병원을 나온 그에게 동정 어린 안부 대신 처음으로 일 얘기를 꺼낸 사람이었다. 세현은 그게 고마워서 찾아왔고, 막상 와서는 모욕처럼 느끼고 있었다.

“청진, 문진, 기록. 환자 상태를 보고 이송이 필요한지 판단하는 것까지.” 그가 말했다. “주사나 절개처럼 손이 흔들리면 위험한 건 안 합니다.”

“혼자 약을 바꾸는 것도요.”

“처방 권한까지 반납한 건 아닙니다.”

“권한 얘기가 아니에요. 첫 달은 우리 팀의 약 확인 방식부터 보라는 겁니다. 집에는 병원처럼 같은 사람이 늘 있지 않아요. 가족이 옮겨 놓은 약, 다른 병원에서 받은 약, 이름 대신 색으로 기억하는 약이 한 상자에 들어 있어요.”

세현은 오른손을 꺼냈다. 손가락을 책상에 편 순간 검지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펜을 잡자 떨림이 더 잘 보였다.

“환자가 알게 됩니까?”

“알아야죠.”

“굳이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숨긴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보다 더 불안한 일이 있어요?”

하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 더 피할 곳이 없었다. 세현은 펜을 놓았다.

“나는 이미 한 번 위험한 의사였습니다.”

“그 사건을 제가 판정하지 않아요.”

“사람이 죽었습니다.”

“알아요.”

세현은 하진이 그 말을 가볍게 받았다고 생각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날, 세현은 수술이 끝난 뒤 보호자 앞에서 같은 자세로 서지 못했다. 설명은 병원 법무팀이 정리했고, 사과의 문장은 회의실을 거칠 때마다 짧아졌다. 그는 자기 판단에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결국 병원을 그만두는 것으로 두 문장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로 누가 숨을 가쁘게 쉬는 것만 봐도 수술실 경보가 들립니다.”

“그러면 들린다고 말하세요.”

“환자 앞에서 내가 불안하다고 고백하라고요?”

“환자에게 기대라는 뜻이 아니에요. 같이 간 사람에게 지금 판단을 다시 확인해 달라고 말하라는 거죠. 선생님이 조용해지면 우리는 침착한 건지 얼어붙은 건지 알 수 없어요.”

세현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대학병원에서는 모르는 표정을 들키지 않는 것이 능력이라 배웠다. 하진은 바로 그 습관이 이 좁은 사무실에서는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고 문 바깥의 센서등이 켜졌다 꺼졌다. 복도 끝에서 청소차 바퀴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선생님이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평생 안 하는 게 그 사람에게 책임지는 방식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대신 한 가지만 봅니다. 손의 한계를 말할 수 있는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지.”

세현은 책상 아래 가방을 내려다봤다. 병원을 떠난 뒤 그는 손을 쓰지 않는 일만 골랐다. 자문서를 읽고, 진료기록을 정리하고, 가끔 후배의 논문 문장을 고쳤다. 누구의 몸도 만지지 않으면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삶과 아무도 돕지 않는 삶의 경계가 점점 흐려졌다.

“왜 나입니까?”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방법만 아는 의사는 많아요.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도 옆에 앉아 있을 의사는 적고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한 달만 보는 겁니다.”

하진은 그를 봐주지도,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세현은 그 무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었다.

그녀는 선반에서 왕진가방을 내려 내용물을 다시 꺼냈다. 체온계의 위치, 충전 확인, 방문 뒤 닦아야 할 물건. 세현은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보다가 약 확인표에서 시선을 멈췄다. 환자 이름보다 ‘환자가 원하는 호칭’이 위에 있었고, 보호자 연락처 옆에는 ‘먼저 연락하지 않을 사람’ 칸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묻습니까?”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잖아요. 병원에서는 환자가 우리 규칙 안으로 오지만, 왕진은 우리가 남의 규칙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진은 신발 덮개를 두 장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현관에서 허락받기 전에는 안쪽으로 한 발도 들어가지 않아요. 보호자가 불러도 환자가 싫다고 하면 멈추고요. 냉장고 문을 열거나 약상자를 옮길 때도 먼저 묻습니다.”

세현은 신발 덮개를 집었다. 비닐 한 장이 수술 장갑보다 가벼운데 이상하게 더 낯설었다. 수술실에서는 환자의 몸을 열기 전 긴 동의서를 받았다. 집에서는 냉장고 문 하나에도 다시 허락을 구해야 했다.

“이건 누가 정합니까?”

“환자가요. 말할 수 있을 때 같이 적습니다.”

“보호자가 반대하면?”

“싸우죠. 대신 환자 없는 데서 결론내지 않아요.”

세현은 표의 빈칸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수술 동의서에는 늘 할 일과 위험이 적혀 있었다. 하지 않을 일과 원하지 않는 사람을 묻는 칸은 드물었다.

“왕진은 몇 명이 갑니까?”

“야간에는 보통 둘이 움직여요. 상황에 따라 연결하고요. 오늘은 선생님이 동행하면 셋이 될 수도 있겠네요.”

“오늘부터라고는 안 했습니다.”

“금요일 칸이 오늘인데요.”

하진이 시계를 가리켰다. 세현은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역할표를 내밀었다.

‘침습 처치 수행하지 않음.’

‘초기 한 달간 문진·청진·기록 및 판단 보조.’

‘중요 판단과 약 확인은 팀원과 상호 확인.’

문장은 초라할 만큼 단순했다. 대학병원 명패 아래 붙었던 그의 직함보다 훨씬 작았다. 그런데 세현은 그 작은 범위조차 책임질 자신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명하면 환자한테도 내 손 얘기를 합니까?”

“필요한 만큼요. 선생님의 사연을 전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거죠.”

“환자가 싫다고 하면?”

“우리가 나와야죠.”

세현은 펜을 들었다. 오른손으로 이름의 첫 획을 긋자 선이 아래로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두 번째 획을 이으려 했다. 하진이 종이를 잡지도, 펜을 빼앗지도 않은 채 말했다.

“왼손으로 해도 서명은 서명이에요.”

세현은 펜을 왼손으로 옮겼다. 글씨는 어린아이처럼 비뚤었지만 이름은 끝까지 적혔다. 하진은 종이를 들어 글씨를 검사하는 대신 조항 세 군데에 체크했다.

“약속한 한계가 잘 보이네요.”

“이렇게 의사를 망가뜨려 놓고 기분 좋습니까?”

“못 하는 일만 적힌 표에, 할 수 있는 일도 적었으니 조금은요.”

하진은 당직표의 금요일 칸에 그의 이름을 썼다. 오세현. 잉크가 마르는 동안 세현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여기는 수술실처럼 밝지도 않았고, 누구도 그의 손에 한 사람의 생명을 전부 맡기지 않았다. 대신 모르는 집의 현관을 넘어가, 그 집에 있는 것들 사이에서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다. 그 책임이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책상 아래 가방을 꺼냈다. 지퍼를 반쯤 열어 낡은 펜라이트만 빼고 다시 닫았다. 수술모와 명찰은 그대로 두었다.

“이건 써도 됩니까?”

“불부터 들어오는지 확인하세요.”

세현이 스위치를 누르자 약한 빛이 한 번 흔들리다 켜졌다. 하진은 새 건전지를 건넸다. 두 사람이 말없이 펜라이트를 손보는 동안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하진이 수화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인사였다. 곧 그녀의 등이 곧게 섰다.

“네, 따님 옆에 계세요? 지금 말씀은 가능하시고요?”

세현은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오른손이 주머니로 들어가려다 멈췄다.

하진은 통화를 이어가며 메모지에 이름을 썼다. 노영숙. 그 아래에 ‘호흡곤란’이라고 적고, 마지막 줄은 천천히 받아 적었다.

집에서 보고 싶다.

하진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세현은 전화만으로 괜찮다고 단정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곧 방문할 팀과도 연결하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메모지 모서리에는 ‘방문 중 악화 시 응급 연계’라고 적혔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하진이 왕진가방을 닫았다.

“첫 근무입니다, 오 선생님.”

세현은 당직표의 자기 이름과 메모지의 환자 이름을 번갈아 봤다.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금요일 칸이 갑자기 현관 하나만큼 무거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