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꽃 위의 얇은 얼음
고향 과수원으로 돌아온 윤보리가 서리 피해와 오래된 관계 앞에서 새로운 선택을 시작한다.
윤보리가 청도행 새벽버스에서 내리자 여행가방 바퀴가 얼어붙은 아스팔트 홈에 박혔다.
두 번 당기고 세 번째에는 발로 찼다. 가방은 꿈쩍하지 않았고, 대신 옆 주머니에 꽂아 둔 퇴직 서류가 반쯤 튀어나왔다. 보리는 그것부터 밀어 넣었다.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치고는 품위가 없었지만 지난 두 달 동안 품위 있게 망한 결과가 이 가방 하나였다.
정류장 맞은편에 세워진 흰 봉고차가 짧게 경적을 울렸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가방이랑 싸워서 이기면 태워 줄게.”
강해진이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어깨가 넓어졌고, 여전히 남의 곤란을 구경할 때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십오 년 만에 하는 인사가 그거야?”
“안녕. 가방한테 지고 있네.”
보리는 손잡이를 놓았다. “안 타. 집까지 얼마 안 돼.”
“여기서 네 집까지 오 킬로미터야.”
“시골 사람들은 다 얼마 안 된다고 하던데.”
해진은 대꾸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보리는 가방을 뺏길까 봐 손잡이를 움켜쥐었지만 그는 가방이 아니라 바퀴 앞에 박힌 얼음 조각만 장화 끝으로 깨 주었다.
“끌 수 있겠어?”
“처음부터 이 정도 도움만 주면 얼마나 좋아.”
“처음부터 말투가 이랬으면 넌 차에 안 탔지.”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보리는 가방을 봉고차 짐칸에 직접 올렸다. 안에는 온도말뚝과 표본봉투, 접이식 사다리가 실려 있었다.
“농사꾼 장비치고 전자제품이 많네.”
“기상관측소 기사 장비야. 농사는 퇴근하고 하고.” 해진이 시동을 걸었다. “어젯밤 늦서리 왔어.”
보리는 창밖을 봤다. 동이 트기 전 산비탈은 먹빛이었고, 과수원 사이 비닐하우스 지붕만 희게 떠 있었다.
“엄마가 말 안 하던데.”
“너 내려오는 날이라고 말 아낀 모양이지.”
“짐만 가지러 온 거야. 오늘 저녁 버스로 올라가.”
해진은 그렇구나, 하고 더 묻지 않았다. 위로도 붙잡음도 없는 대답이 오히려 보리를 불편하게 했다.
봉고차가 윤씨 과수원 아래에 멈췄다. 보리는 문을 열다가 그대로 굳었다.
복숭아꽃마다 얇은 유리 껍질이 씌워져 있었다. 아직 햇빛도 닿지 않았는데 가지 전체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도시 카페의 설탕 공예라면 사진부터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 아래 놓인 온도말뚝은 영하 2.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진이 먼저 내리며 말했다.
“예쁘다고 만지면 안 돼.”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보리가 가까운 가지에 손을 뻗자 해진이 손목을 잡지는 않고 장갑 낀 손을 가지와 보리 사이에 세웠다.
“얼음 녹기 전에 털면 살아 있는 조직까지 부러져. 보는 것만.”
보리는 손을 거뒀다. 꽃잎 끝에 맺힌 얼음이 새벽빛을 받아 투명했다. 예쁘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꽃 안쪽이 검게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반짝임은 장식이 아니라 상처의 표면이었다.
과수원 위쪽에서 최옥순이 앞치마 차림으로 뛰어 내려왔다. 마을 협동조합장인 그는 인사 대신 보리 손에 표본봉투 꾸러미를 쥐여 주었다.
“잘 왔다. 가방은 이따 풀고 아래밭부터 보자.”
“조합장님, 저 오늘 올라가요.”
“저녁에 가. 오전은 남아 있잖아.”
“엄마는 어디 계세요?”
옥순의 눈이 잠깐 작업장 쪽으로 갔다. “시내 농협. 대출 연장 알아보러.”
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시에서 실패했다는 소문이 마을까지 내려온 줄 알았는데, 집안 사정이 자기에게만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 씁쓸했다.
“보험 사고 통지는 했어요?” 해진이 물었다.
“새벽 다섯 시에. 그런데 군 관측값은 영하 0.9도라 냉해 인정이 애매하다는구먼.”
해진은 봉고차에서 휴대용 기록기를 꺼냈다. “공식 관측소는 능선 건너편입니다. 이 밭 저지대는 제 간이 센서가 영하 2.8도를 47분 기록했어요. 제가 제출할 기록에는 센서 설치 높이와 교정일, 피해가 덜한 위쪽 구역 자료까지 같이 붙이겠습니다.”
옥순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많이 상한 것부터 찍으면 안 되나?”
“많이 상한 것만 고른 사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같은 간격으로 위쪽까지 찍어야 현장 차이를 설명할 수 있어요.”
보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표본봉투를 내려다봤다. 흰 봉투에는 밭 번호, 나무 번호, 가지 방향을 적는 칸이 있었다. 상품개발실에서 원재료 샘플을 받을 때 쓰던 양식과 비슷했다. 이름이 붙지 않은 재료는 회의에서 늘 가장 먼저 버려졌다.
“열 걸음마다 하나씩 보면 되겠네요.” 보리가 말했다. “낮은 데만 말고 위쪽까지 같은 간격으로.”
해진이 놀란 듯 보았다. “맞아. 그런데 너 짐만 가지러 왔다며.”
“오전 한때만. 귀경표 취소 안 했어.”
옥순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봉투를 하나 더 얹었다. “그래, 사람 마음은 몰라도 표본은 넉넉해야지.”
세 사람은 밭 아래쪽 첫 줄로 들어갔다. 해가 산 능선을 넘기 전까지는 꽃을 흔들지 않고 외관과 위치만 기록했다. 해진은 적외선 온도계를 꽃에 바싹 대지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쟀다. 보리는 휴대전화로 나무 표찰과 가지를 한 화면에 담았다. 옥순은 농가의 가입수량과 작년 수확량이 적힌 장부를 가져왔다.
“A구역 3번 나무, 남서 가지.” 보리가 읽었다.
“표면 영하 0.6. 얼음 융해 시작.” 해진이 답했다.
“꽃은 몇 개 따?”
“아직 따지 마. 아홉 시부터 같은 간격으로 절단하자.”
“기상관측은 기다리는 일이 반이네.”
“디저트는 안 그래?”
보리는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복숭아 크림 레시피가 떠올랐다. 보리가 시제품 노트에 온도와 시간을 기록해 놓았는데, 팀장은 그 파일을 신입 기획자의 성과로 발표했다. 항의하자 원래 있던 조합을 조금 바꾼 것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인터넷에는 보리가 유명 매장의 레시피를 베꼈다는 글만 남았다.
해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묻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디저트도 기다리는 일이 반이야. 나머지 반은 기다린 사람이 가져가는 거고.”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보리에게 유성펜을 건넸다. “그럼 오늘은 기다린 사람 이름을 봉투에 다 적자.”
아홉 시가 지나 얼음이 자연스럽게 녹자 꽃눈 절단을 시작했다. 보리는 작은 칼을 알코올 솜으로 닦고 꽃눈을 세로로 갈랐다. 겉은 멀쩡한 첫 표본의 꽃술이 먹물처럼 검었다. 두 번째는 가운데가 희었고, 세 번째는 가장자리만 갈변했다.
“이건 살았어?”
해진이 확대경을 들이댔다. “지금은 생존으로 표시. 결실 여부는 더 봐야 해.”
보리는 흰 조직을 얇게 가르는 손에 힘을 줄였다. 케이크 단면을 자를 때는 가장 예쁜 면을 앞으로 돌렸다. 여기서는 보기 좋은 쪽만 택하면 기록이 거짓이 됐다.
열 번째마다 채취하고, 칼을 닦고, 번호를 읽었다. 낮은 밭의 절반을 넘겼을 때 보리 손끝이 얼어 펜을 놓쳤다. 해진이 주워 주려 허리를 굽혔고 보리도 동시에 손을 뻗었다. 두 사람 이마가 가볍게 부딪쳤다.
“아.”
“관측소 기사님, 사람 위치도 관측 좀 하지?”
“움직이는 관측 대상은 예보가 어렵습니다.”
“방금은 내가 먼저 움직였어.”
“사후 분석은 정확하네.”
옥순이 위쪽 줄에서 소리쳤다. “연애할 거면 표본번호부터 맞추고 해!”
“안 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보리는 웃다가 자기 목소리에 놀랐다. 서울을 떠난 뒤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해진도 귀가 조금 붉어졌지만 온도계 화면만 보는 척했다.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예비 결과가 나왔다. 검게 변한 꽃눈 63퍼센트, 살아 있는 눈 37퍼센트. 같은 나무에서도 결과가 갈렸다. 전부 죽었다고 단정할 수도, 공식 기온만 보고 피해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전면 폐기는 막을 수 있겠네.” 옥순이 말했다.
“아직 수확량은 몰라요.” 해진이 선을 그었다. “오늘 기록으로 현장을 더 봐 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습니다. 보상 여부와 범위는 접수된 가입내역과 이후 조사에서 따로 확인해야 하고요.”
보리는 숫자표를 들여다봤다. 63과 37 사이에 올해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 어느 쪽도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예쁜 꽃 사진 한 장보다 쓸모 있었다.
휴대전화에서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귀경버스 알림이 떴다. 보리는 화면을 끄고 작업장 쪽을 보았다.
“짐부터 챙겨야겠다.”
옥순은 붙잡지 않았다. “셔터 열쇠는 네 어머니가 화분 밑에 뒀다.”
가족 가공작업장은 과수원 아래 오래된 벽돌집에 붙어 있었다. 셔터에는 전기료 체납 고지가 빨간 딱지와 함께 붙어 있었다. 보리는 모서리를 잡아 뜯으려다 멈췄다. 떼어 낸다고 체납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안은 서늘하고 달큰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작업대, 기름때 낀 오븐, 비어 있는 냉각 선반. 서울로 올라갈 때 두고 간 계량스푼이 벽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보리는 여행가방을 열어 겨울옷을 쑤셔 넣었다.
뒤에서 문이 삐걱했다. 해진이 작은 보냉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이건 왜 가져왔어?”
“네 어머니가 오전에 부탁했대. 작년 수확 때 가공용으로 손질해서 냉동보관처에 맡긴 게 여섯 상자 있대. 이건 오늘 상태를 보려고 꺼낸 소량 표본이고.”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말했으면 왔겠어?”
“너까지 그 방식 편들지 마.”
해진은 보냉상자를 내려놓았다. “안 편들어. 그래서 네가 싫다고 하면 봉인한 채로 다시 가져갈 거야.”
보리는 상자 뚜껑에 손을 얹었다. 해진은 재촉하지 않았다. 아침에도 꽃을 건드리지 않았고, 정류장에서도 가방을 빼앗지 않았다. 보관기록을 볼지 말지는 보리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녀가 뚜껑을 들었다.
안에는 지퍼백 하나와 냉동보관처에서 출력한 온도기록이 들어 있었다. 라벨에는 지난해 수확일, 손질일, 입고번호가 적혀 있었고, 해동을 시작한 시각도 오늘 오전으로 표시돼 있었다. 조각은 해동되며 모양이 무너졌고 봉투 안쪽에 얼음 결정이 붙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색과 모양만으로 쓸 수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보리는 봉투를 뜯지 않고 기록부터 휴대전화로 찍었다. “여섯 상자 전부 같은 입고번호야?”
“두 날짜로 나뉘어 있어. 오늘 가져온 건 첫 번째 상자 표본뿐이고, 나머지는 냉동보관처에 그대로 있어. 실제로 쓸지는 미정 씨랑 보관상태를 확인한 뒤 정해야지.”
보리는 표본을 다시 보냉상자에 넣고 해진에게 맡겼다. 전기가 끊긴 작업장에 둘 수는 없었다. 여섯 상자. 엄마는 그걸 맡겨 놓고 딸에게 보관료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해진이 상자를 다시 차에 실으러 나간 사이, 보리는 벽에 걸린 계량스푼을 내려 마른 행주로 닦았다.
밖에서 귀경버스 출발 알림이 다시 울렸다.
해진은 화면을 보지 않고 물었다. “몇 시 차야?”
보리는 체납 고지, 녹슨 오븐, 보냉상자 위의 표본 기록을 차례로 보았다.
“아직 취소 안 했어.”
대답하면서도 보리는 작업대 서랍에서 오래된 칼을 꺼냈다. 칼등에는 고등학생 때 새긴 ‘윤보리’ 세 글자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칼을 쓰지 않고 마른 행주 위에 올려놓았다.
해진이 웃었다. “그건 짐에 넣게?”
보리는 칼 아래에 깔려 있던 공책을 펼쳤다. 복숭아가 눌어붙어 실패한 타르트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열여덟 살의 자신은 사진 옆에 ‘다음에는 설탕 줄일 것’이라고 써 놓았다. 남에게 빼앗겼다는 소문도, 원래 누구 것이었느냐는 회의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니. 이것도 실패했었네 싶어서.”
해진이 사진을 보더니 웃었다.
“저건 탔던 게 아니라 거의 발굴이었지.”
“먹을 만하다며.”
“네가 칼 들고 물었잖아.”
보리는 행주 위의 칼을 보고, 그 얼굴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 해진은 이번에는 귀가 붉어지는 걸 숨기지 못했다. 사진 뒷면에는 둘이 타르트를 나눠 든 모습이 있었다. 그는 사진 속에서도 제 몫을 다 먹고 있었다.
버스 출발까지 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보리는 귀경표를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에는’이라고 적힌 오래된 페이지를 접히지 않게 펴 놓았다.